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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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自在(관자재)는 산스크리트어 ‘아발로키테슈바라(Avalokiteśvara)’를 의역한 것입니다. ‘세상을 굽어보는, 스스로 존재하며 관찰하는’의 의미를 가집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자재롭게 관조하여 보살핀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菩薩(보살)은 산스크리트어 ‘보티사타바(bodhisattva)’를 음역 한 것으로, ‘붓다가 되기 위한 길에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行深般若波羅蜜多時(행심반야바라밀다시), 여기서 行(행)은 ‘행하다, 실천하다’라는 뜻이고, 어떻게 행하냐. 深(심) 깊이 행하는데, 앞서 설명한 반야(지혜)와 바라밀다(빠라미-실천방법)로 할 時(시) 때.
위 문장을 직역하면, ‘스스로 (내면 실상을) 관찰하여 붓다가 되기 위한 길에 있는 사람이, 지혜와 그 실천방법으로 깊이 수행할 때’라는 의미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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照見(조견), 照(조)는 ‘비추다, 밝다, 환하다’ 등의 뜻이 있고, 見(견)은 ‘보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조견은 ‘밝게 본다’는 뜻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五蘊(오온)은 ‘다섯’을 뜻하는 五(오)와 ‘쌓다, 저축하다, 모이다’를 뜻하는 蘊(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온은 산스크리트어 ‘칸다(khandha)’를 의역한 것입니다. 칸다는 ‘더미, 그룹, 집합체’를 의미하며, 인물을 구성하는 ‘물리적 정신적 요소이자 일반적으로 감각 경험의 요소’를 말합니다. 그래서 오온은 집착의 다섯 가지 토대, ‘물질적 현상, 느낌, 지각, 정신적 형성, 그리고 인식’을 의미합니다. 한역으로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라고 표현합니다.
이제부터 오온에 대한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색(色)은 산스크리트어 ‘루빠(rūpa)’를 의역한 것입니다. 루빠는 ‘몸, 물질적 현상’을 의미합니다. 수(受)는 산스크리트어 ‘웨다나(vedanā)’를 의역한 것입니다. 웨다나는 ‘느낌’을 의미합니다. 즉, 육체구조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몸느낌, 감각을 의미합니다. 상(想)을 단순히 ‘생각’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상(想) 역시도 산스크리트어 ‘산냐(saññā)’를 의역한 것입니다. 산냐는 ‘지각, 분별, 판단’을 뜻합니다. 그래서 옳고 그름, 좋다 나쁘다 등에 대한 판단을 하는 정신 작용을 상(想)으로 표현합니다. 행(行)은 산스크리트어 ‘상카라(saṅkhāra)’를 의역한 것입니다. 상카라는 번역하기 가장 곤란한 용어 중 하나로 보통 ‘형성’으로 번역됩니다. 정신적인 그리고 육체적인 ‘반응’을 포괄하는 용어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식(識) 역시도 산스크리트어 ‘윈냐나(viññāṇa)’를 의역한 것입니다. 윈냐나는 ‘인식’을 의미합니다. 사실에 대한 인지를 하는 창문 같은 역할을 하는 정식작용을 말합니다.
오온에서 ‘루빠 - 몸, 물질적 현상’을 제외한 나머지 네 가지는 정신작용을 말합니다.
정신작용에 대한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길에서 누군가를 만났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상대방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인식(윈냐나)합니다. 그는 과거에 나에게 욕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산냐’가 작동하여 나쁜 사람이라고 판단합니다. 이와 동시에 ‘웨다나’가 작동하여 몸 안에서 불쾌한 감각이 일어납니다. 불쾌한 감각이 일어나자마자 ‘상카라’가 작동하여 마음속으로는 욕을 하는 반응이 일어나고, 몸은 상대방과 잠시라도 함께 있기 싫다는 바디제스처를 취하는 반응이 일어납니다. ‘인식, 지각(판별-판단하고 구별), 감각, 반응’의 정신적 과정과 육체적 행동이 이처럼 순식간에 일어나며 무수히 반복됩니다.
照見五蘊皆空(조견오온개공) 몸과 네 가지 정신작용 인식, 지각, 감각, 반응을 밝게 비추어 자세히 살펴보니 개공(皆空)입니다. 개공은 ‘모두 비어있다’는 의미입니다.
우선 몸이 왜 비어있다. 공하다고 할까요. 우선 ‘몸, 물질적 현상’을 어떻게 부처가 관찰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관(觀)은 한자적 의미로 ‘자세히 본다’는 뜻입니다. 산스크리트어 위빠사나(vipassanā)라고 합니다. 위빠사나는 ‘모두, 여러 가지’를 뜻하는 ’ 위(vi)’와 ‘꿰뚫어 본다’는 의미를 가진 ‘빠사나(passanā)’가 결합된 용어입니다. 그렇다면 ’ 위(vi)’가 뜻하는 ‘모두, 여러 가지’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앞서 언급한 ‘고, 무상, 무아’의 삼법인을 말합니다. ‘고(苦)’는 한자적 의미로 ‘맛이 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고통, 괴로움’ 등을 의미합니다. 빨리어 ‘두카(dukkha)’를 의역한 것입니다. ‘무상(無常)’은 ‘변한다’는 말입니다. 빨리어 ‘아니짜(anicca)’를 의역한 것입니다. ‘무아(無我)’는 ‘나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는 의미로, 빨리어 ‘아나따(anattā)’를 의역한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삼법인(三法印)이라고 합니다. 부처는 수행을 통해 철저히 자신을 탐구하였고, ‘두카, 아니짜, 아나타’라는 근본이치를 발견했습니다.
정리하면 위빠사나라는 말은 삼법인의 근본이치로 꿰뚫어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현대에 와서 위빠사나를 소위 ‘통찰명상’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실제 수행 관점에서 이야기를 더 전개해 보겠습니다. 수행을 진행하면서 우리는 몸과 몸 느낌, 마음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관찰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하나의 대상인 몸느낌 관찰(웨다나)로도 몸, 마음,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과 몸느낌 네 가지를 관찰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경험을 하는 곳은 다름 아닌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실상의 차원에서 몸 자체는 무정물입니다. 이 말은 몸 자체로는 몸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몸은 오감을 통해 경험됩니다. 오감 역시 자신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마음을 통해 오감이 경험됩니다. 마음 역시도 자신이 생각, 감정, 기억 등 임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마음은 의식을 통해 경험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병원에서 마취를 통해 의식을 사라지게 하여 마음을 경험하지 못하게 하고, 마음을 경험하지 못하니, 오감을 경험하지 못하고, 오감을 경험하지 못하니, 몸을 경험하지 못하는 원리입니다.
다시 말해 몸느낌(웨다나)을 관찰하는 것은 마음,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 몸, 몸느낌 네 가지 대상을 관찰하는 것과 같습니다.
몸느낌을 관찰하는 과정은 신체 표면의 거친 감각을 느끼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몸 내부의 감각을 느끼는 것에서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몸느낌을 관찰하는 시작점으로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신체의 표면의 거친 감각을 느끼며 서서히 미세한 감각을 느끼게 됩니다. 수행을 계속해 나아가면 점차 신체 내부의 거친 감각을 느끼는 단계에서 미세한 감각을 느끼는 단계로 진행됩니다. 신체 내부의 미세한 감각은 더욱 미세해지며 마치 진동 혹은 파동처럼 느끼기 시작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마치 온몸이 용해되는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몸느낌 관찰을 지속적으로 더 관찰하면서 부처’가 말한 ‘웨다나’의 무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몸느낌은 마치 만화영화와 같습니다. TV판 슬램덩크는 초당 10-15 프레임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초당 10장에서 15장의 그림이 연속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 경우 화면이 끊기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극장판으로 제작된 애니메이션은 보통 초당 30장에서 많게는 60장의 그림을 연속적으로 화면에 투사합니다. 이러한 경우 육안으로는 끊김 없이 부드러운 동영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몸느낌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 관찰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동일한 몸느낌을 계속 느낀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실제로 관찰해 보면 몸느낌 역시 ‘있다, 없다’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모니터를 촬영하면 볼 수 있는 플리커 현상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모니터는 스펙에 따라 60hz ~ 144hz입니다. 보통 주사율이라 표현하는데, 60hz는 초당 60번을 깜박거리고 있다는 뜻이고, 144hz는 초당 144번 깜박거리고 있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두 경우 당연히 초당 144번 깜박이는 경우가 육안으로 보았을 때도 카메라로 보았을 때도 플리커 현상을 경험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겠지요. 그럼에도 ‘깜박이고 있다’는 진실은 동일합니다. 다만 그 속도 차이로 인해 관찰하기 위해서는 보다 정밀한 기구, 혹은 내면에서는 자세히 관찰하기 위한 고도의 집중력(사마디)이 필요할 것입니다.
몸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지고를 반복한다’는 것을 여러분이 지적으로 이해했다 가정하겠습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웨다나의 관찰은 ‘마음,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 몸, 몸느낌’ 네 가지를 관찰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머지 세 가지 역시 ‘일어나고 사라지고’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몸, 인식, 지각, 감각, 반응 (오온)은 ‘있다 없다’를 무수히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空(공)은 빨리어 ‘순냐(Suñña)’를 음역 한 것입니다. 순냐는 ‘숫자 0을 뜻하며, 창조되지 않은 것, 사유되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0이라는 숫자는 인도에서 발명된 것입니다. 0이라는 ‘있음’으로 ‘없음’을 표현하는 숫자입니다. 한자 空(공)은 구멍을 뜻하는 구멍 혈(穴) 자와 흙을 다지는 도구인 공(工) 자가 결합한 모습입니다. 즉 ‘도구로 구멍을 뚫었다’는 의미에서 ‘공간’이란 뜻이 됩니다. 즉, 空(공)은 ‘있음(벽면)과 없음(구멍)’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실로 빨리어 ‘순냐’의 훌륭한 번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실상을 경험적 차원에서 철저하게 이해하여 오온이 모두 있다 없다를 무수히 반복하고 있음을 알게 되면(照見五蘊皆空)’ 어찌 될까요?
3장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