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영화를 하며 살 줄 알았던 영화 프로듀서 찬실이는 자신의 ‘일줄’이었던 감독이 갑작스럽게 죽어버리자 곧바로 나이 마흔에 집도 없고 일도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럭저럭 꿈을 이룬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그 성취라는 것이 유리사탕보다 약해서 약간의 충격에도 바사삭 부서져 버리고 말았다.
집도 절도 없는 처지가 된 찬실이는 우연히 만나 연을 맺게 된 남자 영이에게 호감을 느끼고 다가가지만 그는 너는 ‘좋은 누나’라며 그녀의 감정을 거절한다. 찬실이의 마음의 소리가 홍콩의 더운 공기 대신 서울의 칼바람을 맞으며 오들오들 떠는 짭국영의 모습으로 나타나 말한다. “외로운 건 그냥 외로운 거예요. 사랑이 아니에요”
찬실이는 영이를 사랑하지 않는다. 찬실이도 그것을 알고 있다. 단지 찬실이 안에서 영화가 떨어져 나간 자리에 난 구멍을 메워줄 대체재로 그럴듯하게 보였을 뿐. 꽤나 괜찮은 말을 할 줄 아는 짭국영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보면서 나는 언젠가 했던 생각을 다시 떠올렸다. 외로움은 배고픔과 같은 것이어서 사실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식사를 하면 허기가 채워지지만 한 번의 식사로 배고픔을 영원히 잠재울 수는 없다. 음식이 소화가 되고 나면 배고픔은 다시 찾아온다. 누군가는 오백 칼로리의 식사를 하고 하루종일 굶을 수 있지만 누군가는 반나절도 못 되어 주린 배를 움켜쥔다. 외로움이라는 항아리는 이렇게 사람마다 용량이 다를 뿐, 결코 가득 채운 채로 유지할 수 없는 밑 빠진 독 같은 게 아닐까.
외로움은 사람들이 많은 것을 하게 만든다. 기본적인 의식주가 충족되었다는 전제하에 외로움은 인간의 가장 큰 문젯거리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외로움 때문에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친구를 사귀고,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운다. 하다못해 살아있는 것과의 상호작용이 싫은 사람조차 어찌 됐든 외로움에서 빠져나와 정신을 쏟을 행위를 찾아 헤맨다.
그리고 인간의 비극은 이 외로움이라는 공허가 완전히 충족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는 믿음에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친다. 그 믿음 때문에 사람들은 나의 외로움을, 고독을, 사라지지 않는 공허함을 채워줄 그 무엇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것을 계속해서 찾는다. 찬실이에게는 그것이 영화였다.
하지만 그런 것이 없다면? 아무리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고 나도 때가 지나면 다시 허기가 찾아오듯이 외로움도 그렇게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이고 그 어디에도 우리의 구멍을 딱 맞게 채워줄 ‘잃어버린 반쪽’ 같은 것은 없다면. 이 명제를 인정하고 나면 더한 공허에 몸부림치게 될까?
마흔쯤이면 사는 게 뭔지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닌가 보다. 찬실이는 나이 마흔에 ‘사는 게 뭔지 진짜 궁금해졌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안에 영화도 있다’라고 한다. 아마 다시 영화를 하게 된다고 해도 찬실이는 문득문득 외로울 것이며 이따금 채워지지 않는 공허에 슬퍼질 것이다. 그리고 50살이 되어도 사는 게 뭔지 해답을 찾지 못할 확률이 다분하다.
좋은 영화들이 으레 그렇듯, <찬실이는 복도 많지> 또한 물음에 해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다음 날의 일상을 비춘다. 찬실이는 집주인 할머니와 운동을 하고, 밥을 먹고, 재미없는 시나리오를 쓰고, 커다란 달을 보고 감탄하고, 불쑥 찾아오는 친구들을 맞이한다. 그리고 아마 이 순간들 속의 찬실이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