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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모래 Jul 29. 2021

자본주의의 절벽

<미안해요, 리키> <나, 다니엘 블레이크>

“공부하긴 싫고 그렇다고 뭔가 기술이나 직업훈련하려는 시간, 노력 들이기 싫으면 하는 게 콜센터다. 그런 사람들이니 저렇게 행동한다” “제 노력과 삶이 부정당한 느낌이에요”
"학내 노동자가 열악한 직장을 계속 다니는 건, 바깥이 더 안 좋은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서울대가 특별히 노동자 대우가 나쁘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위 문장들은 직장인 커뮤니티 블라인드와 서울대 대나무 숲 페이지에 올라온 글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다. 전자는 건강보험공단 콜센터 직원들의 직고용 시위에 대한 정규직의 말이고, 후자는 과로로 사망한 서울대 청소노동자와 관련하여 서울대 재학생이 쓴 글이다.


블라인드는 직장인들이 사내 메일(따라서 사내 메일 시스템이 없는 중소기업이나 블루 칼라 노동자는 사용할 수 없다)로 신분을 인증하고 사용하는 커뮤니티이다. 그리고 서울대 대나무 숲 페이지 또한 서울대 재학생이 이용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이 두 곳은 일종의 화이트 칼라 엘리트 계급의 소통 창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커뮤니티에서 팽배한 의견이 위와 같은 것이니 ‘능력주의’를 떠들고 다니는 2030한국남성대표(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타이틀이 아닐 수 없다) 이준석 같은 존재가 옹호받는 세태가 놀랍지 않다. 블라인드의 글을 읽다 보면 공채 출신 정규직들이 사용하는 언어에서 큰 위화감이 느껴진다. 이들은 콜센터 직원들이 ‘시험도 치지 않고’ ‘떼법’으로 자신들이 힘들게 시험을 쳐서 들어온 이 자리를 ‘불공정’하게 거저 얻으려고 한다고 비난한다. 자신들이 스펙 쌓고 시험공부를 열심히 한 것은 당연히 보상받아야 할 노력이지만 콜센터 직원들이 CS직무의 업무 강도와 감정 노동을 견디며 쌓은 경력은 아무것도 아니고 ‘공정하게’ 당신들도 ‘공채시험’ 쳐서 정규직이 되라는 식이다. 또한 2-3년 단위로 회사가 바뀌는 위탁업체 파견직이라는 고용 형태를 ‘사기업 정규직’이라고 설명하며 ‘이미 정규직인데 왜 공단 정규직이 되려고 하느냐’며 비정규직이라는 위치를 지워버리기까지 한다.


사망한 서울대 청소노동자는 30여 년간 기자 생활과 NGO단체에서 일을 하다 2019년부터 청소노동자로 일했다고 한다. 건강보험공단 등의 공기업의 정년은 60살이다. 사망한 청소노동자 또한 60대였다. 사실 어른들의 손가락질과 함께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돼"라는 소리를 듣고 자란 세대가 직업의 귀천을 따지며 노동에 등급을 매기는 것은 놀랍지 않다. 자신들은 언제까지나 책상에 앉아 일하는 화이트칼라 정규직일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근시안적 사고도 놀랍지 않다. 하지만 비정규직의 처우 개선이 정규직의 권리를 빼앗고 우리의 노력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들의 언어는 무섭다. 그들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통은 더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육체노동자의 죽음조차 그 일을 선택한 본인의 몫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가진 유일한 논리는 파이론이다. 자본주의 체제를 완전히 내재화한 이 새로운 노동자들은 더 이상 구조의 불합리성이나 모순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신의 몫으로 떨어진 파이의 조각을 뺏기지 않기 위해 약자들에게 칼을 겨누는 행위는 그들에게 더 이상 부끄러운 것이 아닌 영리하고 유일한 생존전략이다.


마크 피셔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라는 지젝의 말을 인용하며 글을 시작한다. 그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란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경제 체계이며 그 대안은 가능하지 않다는 감각’이라고 설명한다. 피셔의 말처럼 자본주의는 아주 효과적으로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했고 우리는 자본주의의 바깥을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전통적인 노동 계급은 와해되었고 노동 계급의 전언 명령 같이 여겨지던 ‘연대’는 현실감각 없는 이상주의자의 잠꼬대가 되어 버렸다. 위를 향해야 할 창 끝은 울타리 안에 던져진 작은 빵 부스러기를 사수하기 위해 옆을 향해 겨누어진다. 한때 세상은 사람들에게 열심히 일하면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열심히 일한 노동자들은 금융경제의 실패의 직격탄을 고스란히 받으며 더 가난해지기만 했다. 그리고 사회는 당신의 가난은 당신이 엘리트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재테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대에 흐름에 따라가려 자기 계발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그 책임을 전가했고 우리는 그것을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미안해요, 리키>는 택배회사에서 면접을 보는 리키의 모습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리키는 실업급여를 받은 적이 있냐는 물음에 "아니요 자존심이 있지, 차라리 굶고 말죠"라고 대답한다. 실업급여에 대한 리키의 이 말은 그가 가진 열심히 일하는 노동계급으로서의 자부심을 대변한다. 하지만 이런 리키의 자부심은 긱 이코노미가 만들어 둔 미로 속에서 독이 될 뿐이다. 택배사는 리키에게 우리는 고용주가 아니며 당신은 동등한 위치에서 이 사업에 합류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자기 운명의 주인공이 되는 거죠. 자신 있어요?" 따라서 리키는 이 사업의 주체이기 때문에 회사는 그에게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는다. 고용 계약도 없고 임금도 없으며 수익은 오로지 배송 수수료로 받는다. 택배차로 사용하는 벤은 사비로 구입을 하거나 빌려야 하고 업무에 필수적인 스캐너 기계조차 잃어버리면 보상을 한다는 조건으로 대여받는다. 정해진 출근도 퇴근도 없어 업무 시간은 자유롭지만 일을 하지 못하면 '알아서' 대체 인력을 구하거나 손해 비용을 물어야 한다. 하지만 회사는 당신이 열심히 일한다면 그만큼의 돈을 벌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이 하루에 14시간씩 주 6일을 일하는 것이라도 말이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리키는 '좋은 노선'을 부여받는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일을 할 수 없게 된 택배기사가 매니저에게 오늘 하루만 휴가를 줄 수 없겠냐고 하자 매니저는 그의 노선을 뺏어서 바로 리키에게 줘버린다. "구시렁대지 않고 제대로 일할 사람"이라는 말과 함께. 이렇게 기업은 나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자리를 뺏어야 하고, 나는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노동자들의 연대를 차단한다.


한편, 리키의 택배차를 구입하기 위해 자동차를 팔아야 했던 탓에 아내 애비는 어쩔 수 없이 버스로 집과 집을 오가며 일을 한다. 애비는 그녀가 돌보는 노인들을 자신의 부모처럼 대하며 최선을 다한다. 그러던 와중 애비는 어렵사리 시간을 내어 준비한 가족 식사 중에 한 고객의 간병인이 나타나지 않았고 가족조차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는다. 결국 그녀는 근무시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고객을 외면하지 못해 가족들과 함께 벤을 타고 집을 나선다. 벤 안에서 함께 웃고 떠드는 가족들과 달려와 준 애비에게 감사를 표하는 노인의 모습은 얼핏 따뜻한 장면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아주 개인적인 휴식 시간마저 침범받는 돌봄노동자의 현실을 보여준다. 자신이 돌봐야 하는 이들을 일이 아닌 사람으로 여기기에 외면하지 못하는 애비의 선한 마음은 결국 그녀가 더 많은 노동을 보수도 없이 하게 되는 독이 되는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리키와 애비 같은 노동자들이 지닌 성실함과 선의는 더 이상 덕목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만든 자기 착취의 감옥을 더욱 공고히 하는 벽돌이 될 뿐이다.


켄 로치의 전작인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다니엘은 심장질환으로 더 이상 일을 하면 안 된다는 진단을 받고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공단을 찾아간다. 하지만 그는 겉으로 보이는 사지가 멀쩡하다는 이유로 수급에서 제외된다. 성실하게 일해 온 노동자라면 당연히 받아야 하는 복지를 구걸하기 위해 그는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포기하고 자신의 무능력을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상황에 던져진다. 참지 못한 다니엘은 ‘나는 개가 아니고 인간이다’라고 선언한다. 노동자의 존엄을 앗아간 사회를 향한 그의 선언은 찰나지만 환호와 격려를 받는다. 그로부터 3년 뒤 <미안해요, 리키>가 만들어졌다. 영화의 말미에서 리키는 강도에게 얻어맞은 몸을 치료도 하지 못한 채 늘어난 빚과 벌금을 걱정하며 절박하게 택배차를 몰고 도로로 나선다. 리키에게는 어떠한 호소나 선언을 할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에게 허락되는 유일한 선택지는 자기 착취의 액셀을 밟으며 자본주의가 만든 절벽으로, 그 아래에 펼쳐진 노동자들의 무덤으로 달려가는 것뿐이다.  


마크 피셔는 오랫동안 앓아 온 우울증으로 끝내 자살했다. 그는 영국의 집단적 우울증에 대해 언급하며 우울증의 병리화가 모든 정치화의 가능성을 미리 배제했다고 말했다. 어떤 우울의 원인은 명백히 외부-정확히는 사회구조-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문제들이 모두 사유화/개인화됨으로써, 사회체계와의 인과관계에 대한 어떤 물음도 차단되고 있다는 것이다.


며칠 전 한 기사에는 고독사 한 30대 청년의 방에 백여 개의 이력서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실렸다. 또 다른 기사에는 일자리에서 밀려난 20대 여성들의 자살률이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는 통계가 있었다. 오늘도 노동 현장에서 사망한 노동자의 뉴스를 보았다. 어제도 비슷한 뉴스를 본 것 같아 같은 기사인지 날짜를 확인해 보아야 했다. 노동을 해도 죽고 노동할 기회를 얻지 못해도 죽는다. 모두가 자본주의의 위기를 이야기 하지만 말들은 힘없이 흩어지기만 한다. 그동안, 자본주의가 만든 절벽에서 조용히 사람들이 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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