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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모래 Aug 18. 2021

무지개를 바라보는 시간들 <플로리다 프로젝트>

<플로리다 프로젝트>  (2017)


플로리다의 눈이 부실만큼 깨끗한 파란 하늘 아래에는 핑크와 보랏빛의 모텔들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예쁜 보라색으로 칠해진 문을 열었을 때 보이는 것은 ’꿈과 희망의 나라‘ 디즈니랜드를 즐기러 온 관광객들이 아니라 빈대가 들끓는 더럽고 좁은 방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홈리스들이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바로 ‘관광지 빈민촌’이라는 이 특수한 공간이다. 마치 장난감 성처럼 예쁜 이 공간의 겉모습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타자들의 모습과의 대비를 위해 일부러 만들어 낸 영화적 공간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만큼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조금의 리서치만 해보아도 이 공간들이 모두 실재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미덕은 단순히 실재 공간을 충실하게 재현해 낸 것에 있지 않다. 영화의 진짜 힘은 이러한 미학적 알레고리 위에 부지런히 포착한 진짜 삶을 덧대어 보여준다는 데 있다.


집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몇 평 남짓의 지저분한 방에 세네 식구가 부대끼며 살고, 그마저도 안전한 주거지로 삼을 수 없어서 매주 단위로 숙박비를 내고 단속에 걸리지 않게 방을 옮겨 다녀야 하지만 영화는 이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에 중점을 두거나 그것을 묘사하는 데 천착하지 않는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이들이 속해 있는 공동체,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쌓아 올린 삶의 모습이다. 영화는 시작부터 이것을 명확히 한다. 영화의 문을 여는 첫 사건은 주인공 무니와 그의 친구인 스쿠티와 딕키의 말썽으로 시작한다. 아이들이 다른 모텔에 가서 남의 차에 침을 뱉어대며 말썽을 피우자 화가 난 차의 주인은 무니의 엄마인 핼리를 찾아간다. 그리고 이때 카메라는 마치 이 커뮤니티에 대한 투어를 제공하듯이 무니와 스쿠티를 따라간다. 그들의 뒤를 따라가며 관객들은 딕키의 아빠, 무니의 엄마 핼리, 말썽을 해결하러 온 바비, 아이들이 페이퍼 타월을 빌리러 가는 세탁실의 버사를 만나게 되고 다시 '퓨처랜드'로 돌아가 아이들이 차를 청소하며 젠시와 친구가 되고 핼리를 다그치던 젠시의 할머니마저 핼리와 이야기를 터놓으며 인연을 맺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이 오프닝 시퀀스를 통해 영화는 단숨에 관객들에게 중심인물들을 소개할 뿐만 아니라 이들이 관계를 맺는 과정 그리고 그들이 속한 커뮤니티를 한번에 소개한다. 어른들의 싸움의 불씨가 될 것 같았던 아이들의 못된 장난은 오히려 그들이 인연을 맺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처럼 영화 속 인물들의 행동은 곳곳에서 관객들의 허를 찌른다. 일견 우리에게 적용되는 상식과 규범 같은 것들이 없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공동체를 지탱하는 그들만의 확실한 룰과 방법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만 그 기준이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천박하고 엉망으로 보일 뿐이다.


소위 밑바닥 인생을 그리는 하층민들의 이야기에서 종종 보여주는 '그곳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인물'이 이 영화에선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을 사 먹을 돈도 없어서 지나가는 관광객들에게 구걸을 하지만 그들은 구걸행위 자체를 마치 재밌는 놀이처럼 여긴다. 외설적인 사진이 박힌 라이터를 주은 것은 성공한 보물찾기이고 그 라이터로 위험한 폐허에 가서 불을 지르는 것은 최고의 놀이이다. 어른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애슐리는 싸구려 레스토랑의 직원이고 핼리는 스트리퍼로 일했지만 그마저도 할 수 없게 되어 관광객들에게 중고 향수를 팔며 푼돈을 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이 얼마나 비참하고 힘든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저 그 상황에서 여력이 되는 만큼으로 살아갈 뿐이다. 헬리와 애슐리는 쉬는 날에는 외출을 해서 마음껏 놀고 모텔 수영장에서 술을 마시며 여가를 즐긴다. 그리고 영화가 보여주는 역설은 이런 부분에서 열실히 드러난다. 그들의 가난한 처지에 수영장이 딸린 집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지만 동시에 가난해서 모텔촌에 살고 있기 때문에 수영장을 마치 제 것처럼 사용할 수 있다. 이렇게 모텔의 장기 숙박객들은 디즈니랜드로 인해 상승한 집값으로 싸구려 모텔에서 하루하루 전전하며 살 수밖에 없지만 조금이라도 먹고살 돈을 마련할 수 있는 수단 또한 그 관광산업에 있다. 엄마와 헤어지게 되는 끔찍한 순간에 처한 무니가 친구의 손을 붙잡고 향하는 곳이 결국 다시 디즈니랜드인 것처럼, 환상의 도시가 만든 가난에 발이 묶여 버린 사람들에게 이 거대한 시스템의 실패는 꿈과 희망은 주지 못할지라도 당장의 하루를 넘길 피자 한 조각 정도는 제공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왔다가 떠나는 관광객들이 남긴 부스러기는 떠날 수 없는 이들의 일용할 양식이 된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아이들의 이야기인 동시에 어른들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아이들의 세계와 어른들의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는다. 그리고 그 간극의 중심에 있는 것이 핼리이다. 핼리는 어른들에 속한 인물이고 무니의 엄마이지만 한편으로는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다. 핼리와 무니의 관계는 모녀라기보다는 일견 철들지 못한 두 아이의 모습처럼 보인다. 핼리는 무니가 어떤 사고를 쳐도 단 한 번도 딸을 혼내지 않는다. 그녀는 자식을 양육함에 있어 먹이고 재워주는 것 이외에 부모 노릇이라고 할 만한 것은 어떤 것도 해주지 못하지만 무니의 가장 가까운 친구인 것은 분명하다. 모텔이라는 공동생활 공간에서 아이들은 쉽게 친구를 사귀고 어른들은 서로의 아이들을 봐준다. 한편으론 돈독해 보이는 이웃 커뮤니티를 유지하는 듯 하지만 사실상 이 기반은 너무나 불안정하다. 무니의 친구인 딕키는 어느 날 아빠와 함께 모텔을 떠난다. 그들이 왜 모텔을 떠나는지에 대한 설명은 일절 없다. 아이들도 그런 식의 이별이 익숙하다는 듯 친구를 배웅하고 짐을 실을 공간이 없어 나눠주는 장난감을 앞다퉈 가져가기에 바쁘다. 핼리와 애슐리의 사이가 틀어지는 장면도 마찬가지이다. 절친한 친구처럼 보였던 그들의 관계는 애슐리가 자신의 아들인 스쿠티가 무니와 함께 놀다가 폐허에 불을 지른 것을 눈치채고 핼리를 멀리하면서 갑작스레 무너진다. 이렇게 단번에 단절된 관계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핼리가 성매매를 하는 것을 안 애슐리가 핼리를 추궁하고, 이들의 소란이 아동보호국으로의 신고로까지 이어지면서 애슐리는 딸 무늬를 잃을 상황에 처한다. 이렇게 오로지 생존이 최우선일 수밖에 없는 이들의 위태로운 커뮤니티는 아주 작은 금에도 순식간에 무너진다.


돈도 벌지 못하고, 집도 구하지 못하고, 어른으로서 아이를 훈육하지도 못하는 핼리는 자격미달의 부모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딸을 빼앗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인가? 무늬가 엄마로부터, 친구로부터, 그리고 자신이 구축한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안전한 가족’으로 옮겨지면 문제는 해결되는가? 영화는 철없는 부모와 통제불능의 아이를 통해 부모의 자격 혹은 정당한 모성 따위에 대한 질문은 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의 모습에 성실하게 피와 살을 붙여 사람과 삶의 이야기를 직조해낸다. 비록 그들 삶의 터전이 싸구려 모텔의 단칸방이라도, 또 다른 하루를 버텨내기 위해 구걸을 하고, 사기를 치고, 몸을 팔 수밖에 없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틈새로 향유하는 삶의 아름다운 조각들이 있다. 그 조각을 포착해내는 절묘한 솜씨를 벗 삼아 영화는 시혜적 연민이 아닌 공감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우리는 그 시선을 따라 파란 하늘 아래서 빵에 잼을 발라 먹고, 빗속에서 춤을 추고, 무지개를 바라보는, 무지개 끝에 있는 황금 같은 아름다운 일상의 조각들과 마주친다. 그리고 그 무지갯빛 조각과 현실 사이를 횡단하며 영화는 사회 시스템의 실패에 대해 질문한다.


이 세계에 ‘성숙한 어른’은 누구도 없다. 가장 어른의 위치에 가까운 바비조차 문제의 해결사가 되어주지는 못한다. 바비의 관조적인 태도는 감독 혹은 관객의 시선과 위치를 대변한다. 그는 모텔 숙박객들의 편의를 봐주려고 노력하고 때로는 보호자 없이 노출된 아이들의 수호자 노릇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역할은 모텔의 관리자라는 한정된 권한과 위치에 제한된다. 핼리와 무니가 다른 숙박객들과 문제를 일으킬 때 핼리를 타이르거나, 아이들이 모텔 근처에서 놀고 있을 때 다가오는 수상한 남자를 쫓아내는, 딱 그 정도의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보호자도 영웅도 될 수 없는 바비의 위치는 핼리와 무니가 아동보호국에 의해 헤어지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을 전혀 돕지 못하고 오히려 그가 조력자가 되도록 만든다. 무니와 핼리가 보호국 직원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바비는 힘없이 뒷마당으로 내려와 희미한 소란을 들으며 담배를 피운다. 그리고 숙박객 하나가 고장 난 세탁기를 사용하는 것을 보며 다음 주까지 세탁기를 고쳐 놓겠노라고 말한다. 바비의 무력함은 이렇게 전달된다. 계단 위에선 엄마와 아이가 생이별의 위기에 처해 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세탁기를 고치는 것뿐이다. ‘친절한 이웃’ 바비는 평범한 관객들이 동일시하기에 가장 편리한 인물이다. 그는 착한 사람이고 핼리나 무니와 같은 아이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도우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절대 구원자가 될 수 없다. 바비는 핼리와 무니를 연민하지만 그 또한 힘도 돈도 없는 싸구려 모텔의 관리인일 뿐이다. 그래서 핼리와 무니가 결국 헤어지게 되는 순간에 관객은 바비의 체념을 함께 경험하게 된다. 영화의 말미에서 도망치는 아이들의 뒤를 바쁘게 쫓던 카메라는 어느 순간 멈춰 서 멀어지는 그들을 가만히 비춘다. 그 체념은 곧 깨달음이 된다. 그들 모두가 처한 상황은 어떤 한 개인의 선한 마음과 노력으로 해결될 수 없다. 디즈니랜드의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아이들의 뒷모습이 남기는 잔상이 너무나 막연한 것은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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