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엔딩 크레딧을 본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에 새겨진 많은 참여 인원의 이름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에 들지 않는 영화일지라도 쉽사리 평가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이상한 영화일지라도, 잘 만들었다고 판단되는 영화와 동일한 시간, 노력과 인력이 투입됐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원래 하려고 했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엔딩 크레딧을 보면 사람들의 노력뿐 아니라, 어떤 부분이 이 영화에 주된 무게 중심을 다뤘는지 보인다. 그런데 시나리오는 어떤 영화든 한줄 혹은 두 줄로 끝이 난다. 영화는 시각적인 매체이기 때문인 것일까? 그러나 타인에게 작품을 설명할 때 시각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왜 이야기로 설명하는 것일까? 그건 인간이 가진 습성에 있다. 언어로 기억하고, 기억되고자 하는 습성 말이다. 내가 본 ‘누들’이라는 영화는 큰 플롯이 존재한다. 하지만, 영화는 감정과 그것의 파동 등을 언어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극에서는 이것을 캐릭터들의 반복적인 행위를 통한 리듬을 만들어서 감정을 설명한다. 영화는 언어가 통하지 못하는 리우와 미리라는 인물이 주인공이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생각했다. 이 리듬이라는 것은 무엇이기에 대사(언어)로 줄 수 없는 감정을 관객에게 주는 것인가?
영화는 홀로 남겨진 아이를 중국에 있는 어머니에게 데려다 주기위한 자매의 여정을 그린 영화다. 로드무비 혹은 성장에 대한 영화다. 극의 주된 정서적 영향을 주고받는 인물들은 어린 소년 리우와 과부인 미리다. 이 두 사람은 성별, 나이, 인종, 거주지역등 처한 상황 등 모든 것이 다르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결핍된 존재다. 어린 리우에게는 어머니라는 존재와의 이별, 부재가 그 결핍이고, 미리는 남편이라는 존재의 부재로 대변되는, 감정적으로 의존할 대상의 결핍이 존재한다. 그러나 남편이라는 존재가 그 시작이었을지 모르나, 현재 미리의 결핍의 결과는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깊게 관여하려하지 않는다는 문제점을 발생시켰다. 영화초반 미리의 조언으로 이지가 길라에게 상담을 받아보라고 했고, 두 사람의 감정이 더 악화됐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집으로 돌아온다. 자신의 상처를 보지 않고, 잃어버리는 것에 익숙해졌다고 말하는 미리는 자심의 감정조차도 깊게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렇기에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형부 이지의 감정을 눈치 채지 못하고, 이 상황을 지켜보는 언니 길라와 잦은 말다툼을 하게 된다. 그러나 꾸준히 두 사람을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이 과정 중에서 형부 이지와 자신의 사이를 언니에게서 오해를 받고 싸우며 상처받고, 극 초반 그 상황이 반복된다.
영화는 이런 결핍된 두 존재가 서로 만나고 부딪히고, 마음을 여는 과정을 극 속에서 몇 가지 소재로 반복을 만들고 그것을 통해 인물의 공통점을 만들어내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일련의 과정 중에는 언어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작품 속에서 언어(문자)는 해결해야할 것으로 등장한다. 사진에 찍힌 글을 해석하기 위해 혹은 그 곳을 찾기 위해 이스라엘 사람들과 중국 사람들이 모두가 사진 속 문자를 보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그것을 보여준다. 극을 살펴보자. 리우가 혼자 남겨지자, 미리는 6년 동안 이곳에서 살았는데 말 한마디 못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리우는 “나는 중국 어린이 입니다.”라고만 반복적으로 말한다. 정체성의 표현일수도 있겠으나, 서로 다른 언어를 하면서 다가서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두 사람은 헤어짐에 다다라 서로 꼭 안아주며 이별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리우가 처음 미리의 집을 도망칠 때 귀찮은 듯이 따라왔던 강아지와의 이별도 아쉬워한다. 결핍의 채움이 언어를 수단으로 활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두 사람의 거리를 좁히는 것으로 반복적으로 등장하여 리듬을 만들어내는 것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누들을 먹을 때의 방법이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언어가 필요로 하지 않고, 꼭 해야 하는 행동이다. 극중 인물들이 먹는 음식은 ‘누들’이라는 중국음식이다. 그래서 리우의 이름을 알기 전까지 자매는 그를 누들이라고 부른다. 누들이 처음 등장한 것은 엄마가 없어진 첫날이다. 리우에게 누들을 줬지만 그는 먹지 않는다. 그리고 새벽에 자매가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 허겁지겁 혼자서 어두운 공간에서 누들을 먹는다. 두 번째 등장한 것은 친구 마티의 도움으로 중국음식점에서 사진에 적힌 언어를 해석하고 중국인과 모두 모여 식사를 할 때다. 그곳에서도 그들은 누들을 먹는다. 그러나 어두운 곳에서 혼자 먹었던 것과 달리 많은 사람들과 빛이 많이 잡힌 밝은 공간에서 식사를 하며 젓가락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주며, 방법을 배우며 모두 웃으며 밥을 먹는다. 감독은 리우와 미리에게 이런 반복적인 행동을 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감정적인 거리를 좁혀 나가는 모습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장난스럽게도 아파트에서 사진을 찍고나온 후 미리와 길라가 말다툼을 하는 와중에 리우가 샌드위치를 받을 듯 받지 못할 듯한 상황이 몇 번 지속되고 이내 리우는 샌드위치를 받아들고 한입 맛있게 베어 문다. 이 장면도 첫날 음식을 혼자 먹는 모습과 대조적으로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졌음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또 하나의 반복은 그들의 손에서 찾을 수 있다. 첫날 리우는 그 집을 탈출한다. 귀찮은 강아지와 함께. 그리고 강아지 때문에 자매들에게 위치가 발각이 되고 나름의 추격전이 벌어진다. 리우는 그때 넘어지면 손을 다치게 되고, 미리는 리우의 손을 보기위해 자신의 손을 뻗지만 리우는 미리의 손을 때린다. 하지만 후반부 공항 장면을 상기해보자. 두 사람은 캐리어와 사람들의 시선, 언어라는 장애로 인해서 손으로 수신호를 주고받게 된다. 더 나아가 두 사람만이 공항에서 버스를 타게 되자 캐리어 속으로 미리가 손을 집어넣자 리우는 그 손을 꽉 잡는다. 첫 등장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줬었으나, 결국 두 사람의 안위, 무서움 등의 감정을 상쇄시키는 것이 그들의 손이 된 것이다.
영화를 보면 미리만이 리우에게 도움을 준 것은 아니다. 리우 또한 미리에게 도움을 줬다. 그 도움은 가볍게 보자면 포크로 누들을 먹는 그녀에게 젓가락질 하는 방법을 알려준 것을 들 수 있다. 실은 이것보다 더 큰 이유는 두 번째다. 리우는 미리에게 정서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그녀는 남편을 두 번이나 잃은 과부이기 때문에 남편들을 하늘에서 소환하지 않는 이상, 그녀의 결핍을 메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그녀는 결핍을 통해 문제를 겪고 있다. 타인, 자신의 문제에 깊게 관여하거나 문제와 대면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런 미리에게 리우는 어찌 보면 또 다른 잃어버림과 결핍의 대상이다. 그러나 앞서 두 번의 경우와는 다르게 그녀는 리우와 이별을 시간을 들여 준비했다. 두 사람의 싸움, 사진을 찍기 위해 문 닫힌 집에 몰래 들어가는 위험을 함께한 동지애, 문제해결을 함께했다는 기쁨의 감정 등은 모두 이별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미리의 죽은 남편들의 사진을 보고, 직접적으로 물을 수 있는 순진한 존재 이면서도 그에게도 (엄마라는) 그리움이 대상이 있다는 공통점을 가진 리우가 안아주는 온기가 미리에게 누군가를 잃어버렸다는 고통에서 잠깐이나마 그녀를 꺼내준 것이라 생각한다. 더불어, 미리는 리우의 통해 문제를 대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의 해결과 용기를 보여줬다. 리우가 미리와 남편의 사진을 보며 질문하고 대답하는 장면은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는 그들을 나타내는 장면이면서도 그 후 꼬맹이가 좋아졌다는 말을 하는 미리가 감정에 대해 처음 이야기하는 것으로 연결되는 장면이기도하다.
영화 누들에서 리듬을 만드는 것은 캐릭터들의 행위다. 캐릭터들의 조우와 섞임, 충돌, 반복 등을 통해 생기는 감정적인 빈공간과 가득 채워짐의 높낮이로 인해 리듬이 생겼다. 그것을 관객은 본다. 시각적으로 본다는 것이 아니라, 체험을 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관객은 공감하고 캐릭터들의 이해를 할 수 있는 감정적인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그래서 이 영화가 언어를 통하지 않는 두 인물을 주인공으로 세웠음에도 감성적으로 관객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