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밤’이라는 시간을 향유하는 방식
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윤단비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부모’라는 존재의 부재를 받아들이는 남매를 보여준다. 영화 제목이기도 한 <남매의 여름밤>에서 지칭하는 남매는 ‘아빠와 고모’ 혹은 ‘옥주와 동주’를 가리킨다. 이렇듯 중첩되고 중의적인 ‘남매’라는 관계설정으로 인해 관객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혹은 관객은 작품을 어떤 방식으로 향유하게 되는 것일까. 이 질문은 관객에게 ‘가족’이란 혈연으로 묶인 관계에 대한 중첩 혹은 반복으로 풀이를 유도한다. 하지만 정작 극이 종료된 후, 관객은 가족 서사에 얽매이지 않는다.
특이하게도 <남매의 여름밤>은 극중 캐릭터가 보내는 여름밤이라는 시간을 상기시키지 않고 관객들을 대상으로 개인이 갖는 추억의 시간으로 회귀시켜버린다. 등장인물의 ‘여름밤’이라는 시간 대신 관객 개인의 추억 속 기억들과 어린 시절 지나온 여름 시간에 대한 감정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관객이 본 시각적인 영역의 영상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런 의문을 뒤로한 채 작품을 복기하면, 내러티브와 상관없는 장면들이 등장함을 알게 된다. 예를 들면 “#1. 어스름한 노을이 지는 풍경 너머로 옥주는 자전거를 타고, 동주는 그런 누나를 따라 달린다. #2. 동주는 큰 소리로 마당에 있는 식물에게 물을 주는 할아버지를 큰 소리를 부른다. 이에 호응하듯 할아버지는 그를 보며 미소로 짓는다. #3. 가족 모두가 자는 시간, 생일을 맞이한 할아버지가 거실 소파에 앉아 <미련>이란 노래를 들으며 맥주를 마신다. 이 장면을 2층 계단에서 손녀 옥주가 바라본다.” 등의 장면들이다.
이런 장면은 감독 개인적인 경험에서 파생된 이미지 혹은 <남매의 여름밤>이 보여주는 이야기의 이미지라 여기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이 지점이 이상한 이유는 각기 상황들과 맞물려 호응 할 장면들은 카메라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1.의 경우에는 자전거를 타고 공을 차는 아이들의 모습 이 후 병원에서 돌아오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모습으로 연결되고, #2.의 경우에는 동주의 부름에 화답을 한 할아버지는 끝내 동주와 대화를 하지 못한다. 하물며 #3.의 경우에는 가족들이 자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큰 소리로 음악을 듣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옥주밖에 없으며, 옥주 또한 그런 그를 바라본 후 계단 위로 올라가 음악을 듣는 것처럼 스토리가 이어지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 장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 장면들이 섞인 여름 시간이 지난 후, 인물에게 각자 필요한 것이 생겼다는 것이다. 우선 옥주에게는 햇볕 잘 드는 방, 친구를 만나러 갈 자전거가 생겼고, 동주에게는 자신과 함께 대화를 할 할아버지와 공놀이를 할 수 있는 축구공이 생겼다. 할아버지 또한 오랜만에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더불어 이 대응되지 않는 장면들은 ‘인물에게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이란 공통점을 지닌다. 그러나 이것이 다시 오지 않음을 아는 사람은 관객뿐이다. 이러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갖는 역할은 불분명하다. 심지어 장면들끼리 호응되지 않고, 인물이 무엇을 얻었다는 추측성 공통점이 있을 뿐이며, 스토리의 구심점이 되지 못한다. 이런 맥락에서 해당 장면들은 비효율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이 등장하는 이유는 두 가지로 추측이 가능하다. 첫 번째 이 장면은 아버지가 동주에게 했던 장난처럼 등장인물에게 추억이 되어 기억 속으로 저장된다. 그러나 이는 현재 진행되는 영화의 시간 속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며, 영화 속에서 동주와 옥주에게는 짧은 여름방학이 끝나가고 있었고, 이것이 그들에게 각인됐는지 확인할 수 없다. 할아버지는 또한 죽음을 맞이하기에 기억을 추억으로 만들 수 없다는 단점을 갖는다.
두 번째 이유는 관객에게 ‘여백’을 주기 위함일 것이다. 극이 관람객에게 주는 여백의 역할은 ‘공감·공명의 끊김’이다. 여백의 생성으로 인해 인물에게 동화되어 생성된 감정들은 관객에게 미처 소화되지 않는다. 그와 동시에 관객은 여기서 극과 떨어져, 스크린을 마주보는 상태로 복귀한다. 영화 <남매의 여름밤>안에서는 옥주의 신발판매 사건, 고모·고모부의 싸움, 할아버지의 죽음 등의 일화가 생긴다. 풍성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한정된 등장인물만의 이야기가 반복됨으로 인해 관객은 스크린 속 세상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없게 된다. 이와 동시에 스크린 밖 어둠만이 존재하는 극장 안의 세상 또한 관객에게 빛나는 스크린 외에 아무 정보도 주지 못한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관람자는 등장인물에 대한 몰입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극 흐름 중간에 등장하는 여백으로 인해, 관객은 인물에 대한 자연스런 몰입이 중단되고 집중력이 흔들린다. 그리고 그 찰나, 극 중 인물에 대한 감정이 다시금 공명되기 직전에 관객은 ‘자신만의 여름밤’으로 회귀한다.
스크린 안과 밖 세상에 대한 정보가 없어 집중을 할 수 없고, 인물에 대한 집중이 흔들려 몰입이 끊기는 그 순간, 인물과 작품 사이의 공명이 흔들리게 만드는 여백이야말로 영화 <남매의 여름밤>이 내어주는 관객의 자리다.
<남매의 여름밤>은 관객에게 독특한 감상을 남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관람 중에 관객에게 보이는 스크린 속 시각적 이미지와 그로 인해 관객이 상상하는 이미지는 대부분 같다. (다만 해석하는 방식에 따른 차이가 발생할 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관람자에게 시각적(물리적) 이미지를 보여준 후 생기는 이미지와 관객이 관람 후 스스로 복제해낸 이미지(정신적)는 상이하다. 이는 극의 중간에 삽입된 공감·공명의 끊김을 통해 여백이 생성되고, 그로 인해 관객이 자신의 위치를 상기하며 영화를 관람하기 때문이다. 이는 영화 관람 후 관객이 스스로 텍스트를 복제하는 것과는 다르다. 관객과 영화라는 매체 사이에 공감이 되기 직전에, 그 사이에 거리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이 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어찌 보면 차갑게 자신의 이야기를 올곧이 간다. 그리고 그 뒤를 바라보는 관객에게 자신이 보여주는 시각적 이미지의 복제 대신 스스로의 이야기를 떠올리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그렇게 그들의 여름밤은 ‘나(관람자)의 여름밤’으로 치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