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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정 Jun 14. 2022

영화 <브로커> 감상평





01. 

영화 <브로커>를 봤다. 실제 이 글은 <브로커>에 대한 두 번째 쓰는 글이다. 첫 번째 글은 다 작성하고, 복사하는 과정에서 사라졌다. 그래서 이 글은 어제 쓴 내 글에 대한 복제와 변형인 셈이다.

복제와 변형을 하며 작성하는 글의 글감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브로커>라서 기시감이 든다. 

나는 영화 <브로커>를 보면서 실망을 금치 못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사회적 실험이라 여겼던 가족범주에 대한 변형과 변주가 복제의 수준에 머물렀고, 결과물을 어두운 공간 안에서 홀로 마주했기 때문이다.

나는 적어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전작들을 보면서, 감독은 혈연과 비혈연의 간극에서 가족형성에 대한 실험을 한다고 생각했다. 등장인물의 삶의 전반적인 태도, 습관, 양식등을 통해서 말이다. 

그런데 이번 영화 <브로커>를 보면서 착각하고 있던 부분을 깨달았다. 가족이 아니라 공동체에 대해 감독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고, 가장 안전하면서도 윤리적인 물음에 당착할 수 있는 ‘‘가족’은 소재로서 채택된 것이구나’ 라는 깨달음이었다. 그리고 감독 스스로가 가족이란 소재를 버리고, 공동체와 사회(혹은 국가)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구나 라는 생각도 덧붙여 들었다.


02. 

영화 <브로커>를 보며 나는 “한 명의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문장을 되새겼다. 이 영화는 그 자신이 마을이 되어, 아이를 키우기 위해 시간을 보내며 이동한다. 그리고 여기서 마을(영화)이 키울 아이는 비단 우성 뿐 아니다. 등장인물 모두를 가리킨다. 그렇다고 하여 이 영화가 성장영화, 로드무비영화는 아니다. 영화는 인물의 성장할 수 있도록 외부세력을 제거하는 역할을 하며, 아이들끼리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세상을 깨고 나와야 할 존재로 인식시키기 보단, 그 세계에 순응을 하되 그 안에서 해결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일까 <어느가족>과 <브로커>에서는 “한 뼘의 성장”을 하기 위해 인물들을 너무 멀리 돌아가게 한다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지루했을까.

03. 극을 관람하는 초반, 나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분명 영화를 보고 있는데, 연극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뭔가 공연실황을 보는 기분이었는데, 이 느낌은 배우와 등장인물 사이에 장막이 있어 합쳐지지 않는 인물을 보는데서 유래한 것 같았다. 이 장막은 초반 이후에 사라졌지만, 송강호(상현)를 보면서 영화 <밀양>의 김종찬씨가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건 연출, 배우 중 어느 쪽의 문제인지 알 수 없지만 가장 확실한 문제는 바로 영화배역에 피로감을 느끼는 관람자 ‘나’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오직 ‘이지은’ 만이 초반부터 중심을 잡고 지탱해나갔음은 분명하다.


04. 

영화 <브로커>는 실내·외 촬영에 대한 구별이 별로 없어 보인다. 대낮에 촬영되는 장면에 인물이 등장한다면 실내에서 촬영을 했고, 실외를 촬영해야한다면 밤 혹은 해질 녁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대낮에 실외에서 등장하는 장면은 보육원에서 아이들과 처음 만났을 때/해준이가 바다에 소변을 눌 때/ 우성이와 수진(배두나), 수진의 남편이 바닷가에 등장할 때/ 소영(이지은)이 주유소에서 일을 마치고 공원에 나갔을 때 정도다. 등장인물들 모두가 밝은 곳으로 나가기 어려운 건 아닐까, 밝은 곳으로 나갈 수 있는 건 윤리적/사회적으로 안정을 찾았을 때 가능한걸까.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빛과 어둠을 활용해 인물의 진심을 종종 이야기했다.

이런 장면은 <걸어도걸어도>에서 엄마(키키키린)가 식탁에 앉아 아들에게 실제 속마음을 이야기할 때와 유사한 빛 활용 방식이기도 하다. 상현이 열차 안에서 소영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장면과 모텔에서 불을 끈 채 “태어나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장면, 관람차 안에서 동수와 소영의 대사는 모두 어둠속에서 뿜어져 나온다. <브로커>속 인물들은 빛이 사라진 순간에서만 속마음을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래서 내심 안타까웠다. 빛과 어둠이 주는 단면적인 효과 설정이 관객에게 즉각적인 감정대응으로 이어질 수 있으나, 인물을 단편적으로 그리는 것 같아 씁쓸했다. 그리고 이런 빛을 활용하는 도식 말고, 인물의 도식 또한 식상했다.

우영, 해솔, 동수라는 세 명의 인물은 한 인간의 삶의 변화를 이미지화했고, 상현과 소영은 부성과 모성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등장했다. 이 활용이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이 도식이 단순 인물에 대한 다양성을 표방한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버림받‘을’/버림받‘은’/버림받았으나‘용서해줄’ 인물과 아버지와 어머니로서 자식을 생각하는 모습이 각기 다른 인물이 가진 개성에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아버지/어머니/자식의 성향을 보인 인물로서만 등장하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05.

하지만 정말 그럼에도, “다시 시작할 수 있고” “태어나줘서 고마운” 사람들이라-

그런 희망을 품고 있어 줘서, 고레에다 감독이 아직은 좋고, 그가 있어서 나도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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