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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의선 May 09. 2023

#4. 소수의 연인

[분기간 이의선]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나는 사람한테 거는 기대도 없고 바라는 바람도 없어.' 외로움을 친구 삼아 살아가면서도 인연에 기대지 않겠다고 주문처럼 외웠다. 그도 그럴 것이 좋아하는 상대가 내가 기대한 만큼의 애정을 쏟아 주지 않으면 한순간에 돌아 서 혼자만의 세상으로 들어가 나 자신을 꽁꽁 숨겼으니 말이다. 상처받고 싶지 않아 사랑을 주는 것도, 받는 것도 거부하며 살기로 했다. 어차피 나는 거부받을 거야,라고 생각하면 모든 게 수월해진다. 사춘기 시절 느꼈던 사람과 사랑에 대한 불완전한 생각이 수년간 나를 차갑게 만들었던 것 같다. 어린 나는 인생에서 인연은 그다지 중요치 않은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냉소를 일삼을수록 사람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는 것을 그땐 몰랐다.


     나보다 훨씬 먼저 취직한 대학 동기들이 각자의 입사 동기와 친하게 지내는 게 신기했고 참 부러웠다. 퇴근 후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때때로 여행도 다니는 걸 보며 어쩌면 전장에서 만난 전우들이라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들이 졸업과 함께 일을 시작했을 때 나는 본격적인 실험실 생활을 시작했는데, 미묘하게 감도는 경쟁심과 상하관계가 뚜렷한 좁은 실험실에서는 모두가 사수였고 모두가 부사수였다. 그랬던 나도 어느새 입사 3개월 차의 신입 연구원이 되었다. 눈치껏 분위기를 읽으며 신입의 성실함을 무기로 하루하루 보내고 있다. 유독 사무적이고 개인적인 이 회사는 인간관계에 지쳐있는 나 같은 사람조차 누군가를 찾게 만든다. 주 5일, 하루 8시간 이상을 보내는 일터에 서로의 속 사정을 아는, 거기 있음이 달가운 사람이 곁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바라곤 한다. 인생은 인연이 전부라는 진부한 말을 이제야 실감한다.


     직장 생활의 허망함이 들어차는 요즘, 나에게도 소중한 회사 동기가 생겼다. 그는 나보다 5개월 먼저 입사한 선배이다. 하지만 서로의 존재에 위로받고 의지하니 동기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 한다. 회의 시간마다 내 건너편에 앉는 그는 도도한 얼굴로 아이패드에 늘 끊임없이 뭔가를 적는, 상당히 학구적인 사람으로 보였다. 펜슬을 꼭 쥔 손에 불쑥 올라온 잔 핏줄과 도드라진 뼈 마디가 왠지 어른스러워 보여 감히 말을 걸지 못하고 며칠을 보냈다. 연구소 회의가 끝나고 탕비실에서 물을 마시는 그와 마주쳤다. 회의 때와는 다른, 편안한 얼굴로 그는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연구원님, 미팅 시간에 괜찮으세요? 저는 연구소 회의 들어가기 싫어서 월요일 출근길에 항상 경미한 사고가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가 말을 거는 와중에 나는 마스크에 가려져 있던 그의 얼굴이 생각보다 귀엽다는 것, 아담한 체구에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쁜 사람이라는 사실을 내심 깨닫고 있었다. 그는 회의 때 대표님의 뜬금없는 질문으로 자기가 얼마나 당황했었는지, 답을 몰라 허공을 보며 엉뚱한 대답을 했는데 그 대답은 완전한 오답이었다는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면서 회의가 참 싫다고 말했다. 상황을 묘사하는 그의 움직임이 너무나 생생해서 나는 배를 잡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심각한 이야기를 너무 웃으며 들었나 싶어 그의 반응을 살피니 오히려 웃어주니 심각하지 않은 일이 되었다고 했다. 그 이후 우리는 동료에서 친구가 되었다.


     첫인상과는 다른 그녀의 밝고 쾌활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까지 기분이 좋아진다. 그때 나는 다른 연구원들과의 관계에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는데 그녀의 자조 섞인 일화를 듣게 되니 나만 처음이 어려운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녀를 '예민'이라 부르겠다. 우리는 일하는 분야가 달라 일이 겹치지 않지만 서로의 사정은 잘 아는 거리에 있어 맞장구치며 수다 떨기는 좋은 거리에 있다. 날이 따뜻해지면서 점심시간마다 회사 주변을 배회하고 볕이 좋은 자리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시간은 8시간의 일과시간을 버티게 해주는 힘이 되어준다.


     예민과 함께 산책하는 시간이 즐거워 매주 금요일마다 밖에 나가 점심을 사 먹자고 했다. 회사 주변은 오피스 지역이라 일찍 나가지 않으면 어느 가게든 사람이 붐빈다. 지난주 우리는 12시가 되기 10분 전에 슬그머니 일어나 점심을 먹으러 다녀왔다. 둘이 동시에 나가면 이상하니 자연스럽게 화장실 가듯 빠져나왔지만 한편으론 누군가 알아차려도 상관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건 10분을 얕잡아 본 우리의 안일한 실수였다는 것을 그땐 몰랐다. 햇살은 따뜻하고 바람은 선선한 게 완벽한 금요일 점심이었다. 우리는 미리 정해놓은 가게에 가서 마제 소바 한 그릇씩을 비웠다. 밥까지 싹싹 비벼 먹고 나왔는데도 아직 점심시간이 40분이나 남아 이거 꽤 괜찮은 전략이구나 싶었다. 이제 매주 10분 정도 일찍 나와 점심을 먹자며 말이다. 매일 마시는 공기가 오늘 왠지 유독 상쾌하다며 우리는 별것 아닌 이야기에도 호들갑을 떨며 신나 했다. 그렇게 행복한 점심시간을 보내고 사무실에 돌아왔는데 들어온 우리를 보고 선임연구원님이 말했다. "두 분 오늘 점심 일찍 드셨죠? 일찍 나가시면 그래도 점심 먼저 먹겠다고 다른 분들께 인사 정돈해 주세요."라고.


     우리는 감히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둘 다 뒤통수를 한방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좋았던 기분은 먼 과거가 되었다. 자리에 앉아 생각했다. 그분은 분명히 좋은 의도로 하신 말씀일 거라고, 절대 면박을 준 게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마인드 컨트롤에 들어갔다. 하지만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은 나의 통제 영역 밖이다. '10분 먼저 나간 게 잘못이었을까?', '아니면 식사 맛있게 하시라고 인사를 안 해서?', '그것도 아니면 우리가 몰려다니는 게 아니꼽나?' 이날 우린 다신 일찍 밥 먹으러 나가지 말자 약속했다.


     그날 이후에도 우리는 매일 점심을 먹고 회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가 수다를 떨며 웃는다. 마치 중고등학생들이 점심시간에 운동장을 뱅뱅 돌며 깔깔거리는 것처럼. 다음번에는 함께 반차를 쓰고 나가기로 했다. 맛있는 점심을 천천히 편안하게 먹자고, 여유 있게 차도 마시자고 약속했다. 어리숙한 신입 둘이 의지하며 정 붙이는 모습이 내가 봐도 안쓰럽고 애틋하다. 언젠가 우리 중 누가 퇴사하게 된다면 5개월 전부터 언질 해줘야 한다며 신신당부를 했다.


     좋은 사람과 일상을 함께 하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지금에서야 알아차린다. 사람은 웃음 포인트와 빡침 포인트가 맞아야 친해질 수 있다고 하지 않나. 그런 사람이 하루 삼분의 일의 시간을 보내는 회사에 있다는 게 든든하다. 퇴근하고 소파에 앉아있다 문득 생각했다. 모든 사람들을 내 영역에 들이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동시에 내가 선택한 인연을 내 영역에 들여 함께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최근 방영되는 인기 연애 프로그램에 40대의 솔로들이 나와 하는 말을 들으니 인생의 동반자를 차곡차곡 모아놓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절감했다. 더 이상 청춘이 아닌 그들은 이제 집도 있고 차도 있고 시간도 있는데 인연은 없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돈, 시간, 건강 모든 걸 가져도 내 옆에 좋은 사람이 없다면 참 쓸쓸한 인생이겠구나. 먹먹한 인생이겠다고 생각했다.


     세월이 지나가며 실감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춘기의 나는 입으로는 사람이 싫다고 말했지만 결국 사람으로 치유받고 사람에게로 나아갔다. 불교에 일인일우주(一人一宇宙)라는 말이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곧 하나의 우주'라는 말이다. 한 사람을 아는 것이 무수한 별을 담고 있는 우주를 아는 것과 같이 대단한 일이라는 것. 어린 나는 모든 사람의 연인을 꿈꿨기에 자주 다치고 자주 울었다. 기대하는 마음이 돌아오지 않으면 가슴 깊은 곳으로 떠내려가 단단한 철문을 걸어 잠그고 하염없이 낙망했고 결국 자신을 미워했다. 이제 나는 만인의 연인이 아닌 소수의 연인으로 거듭나고 있다. 한 사람이라는 우주를 접할 때 그 안에 든 나를 본다. 이제야 인생이 뭔지를 알 것 같다 말하는, 아직은 애송이인 나는 그런 이들을 하나씩 내 마음에 모아가고 있다. 재미없고 단조로운 인생을 유쾌하고 재미있게 꾸미기 위해서. 아마 다들 마음속에 품고 있을 것이다. 이유 없이 좋은 사람, 내 것을 다 줘도 아깝지가 않은 사람,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한 사람 말이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지 않다. 아끼는 이들에게 조금도 부족함 없이 사랑을 줬던 사람이고 싶다.





분기간 이의선

分期間 李宜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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