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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뻬릴 Aug 02. 2021

공허하고 나약한 탈근대 스릴러

디스코 엘리시움(로베르토 쿠르비츠, 2019)

근대 사회의 특징이 무엇이냐 물으면 아마 많은 이들이 이성, 조직, 이념, 자아 등의 개념을 떠올릴 것이다. 우리는 그 아이디어들의 신성한 결합을 통해 전쟁국가/복지국가와 노동자계급/자본가계급이 인류 안에서 부상하였음을 역사적 경험으로 알고 있다. 후기 구조주의 혹은 탈근대 사회를 두고 무엇이라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고 학자마다 의견도 갈리지만, 그게 무엇이든간 구조가 인간을 이성, 조직, 이념, 자아로부터 어떻게 축출하는지를 묘사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국가와 계급은 완고한 겨울처럼 안락하였다. 잔인한 봄, 모두가 머물 자리를 잃어가는 "액체 근대"의 시기에 나타나는 가장 흔한 반응은 부정이다. 이미 잃은 확고한 자아에 집착하는 저항 활동이 유토피아에 대한 약속 안에서 조직화되고 합리화된다. 그러나 이 너무나도 근대적인 시도는 유토피아도 무너지고, 조직은 연결망으로 대체되며, 이성은 규탄되는 오늘날 보통 실패하며, 결국 발산되지 못한 에너지만 개개인의 신체 수준으로 후퇴하여 무의미한 '노오오오력' 속에서 정신질환으로 포착된다. 나는 이런 퇴행적 집착의 대표적인 두 양상이 속물화된 사회운동과 자기계발의 유행이라고 생각하는데, 앞선 주장대로라면 이를 근대가 저물어가는 징후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2019년 말 발표된 "디스코 엘리시움"은 부정과는 다른 방식의 집착을 다룬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연민과 그리움. 근대 사회가 굳건하였을 때는 자그마한 일탈로 향유할 수 있었던 것들이 사회의 구성 원리 자체가 되어갈 때 느껴지는 경악과 공포. 디스코와 엘리시움을 각각 열망했던 세대가, 디스코와 엘리시움이 결합된 혼종으로서 현재를 마주하게 됐을 때 겪은 혼란과 후회가 이 게임에 담겨있다. 형해된 계급과 자아, 저물어가는 국가와 유토피아 속에서 주인공을 개별자로 규정해주는 것은 정신병리학의 언어로 쓰인 정체성 정치뿐이다. 망가짐으로써만 아직 부술 '나'가 남아있음에 안도할 수 있는, 내용을 잃었기에 온갖 이념의 수사를 패션으로 걸쳐야만 외형을 유지할 수 있는 주인공이 이 시대의 인간을 대변한다. 


드라마 "더 와이어"와 영화 "메멘토"를 합쳐놓은 듯한 작품이다


"디스코 엘리시움"의 주인공은 본인의 정체를 기억하지 못하는 형사이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증빙할 수 있는 물건 대부분을 잃어버린 상태로 자기 파괴 충동에 시달린다. 명목상 그의 경쟁상대이나 실제로는 그를 도와주는 킴 키츠라기 경위가 그가 머무는 술집에 도착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들은 최근 항구마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아내야 하고, 이를 위해 각종 조직에 소속되어 나름의 이념을 지닌 다양한 인물들과 대화를 나누게 된다.


주위의 적대적 환경보다는 주인공 캐릭터 자체가 주인공에게 가장 실질적인 위협이고, 이를 더욱 효과적으로 풀어내고자 본 게임은 기존 RPG 장르의 시스템을 조금씩 비틀어 활용하는데, 그 까닭에 본 작은 RPG라 부르기에 애매한 무언가가 되었다. 가장 많은 플레이어가 주목한 점은 TRPG 룰에 기반한 RPG임에도 불구하고 전투가 없다는 점이다. 블랙아일 스튜디오의 전설적인 RPG 걸작인 "플레인 스케이프: 토먼트"의 경우에도 전투보다는 대화를 중심으로 게임이 전개되었는데, 해당 작품의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전투는 시간 때우기 요소에 불과했다는 악평을 받았다. 그런 점에서 전투라는 요소를 선택 가능한 대상으로 보고 버린 것은 납득할만한 선택이다.


전투가 빠졌음에도 본 작을 여전히 RPG라 부를 수 있을만한 요인이 남아있는가. "디스코 엘리시움"은 캐릭터 형성 과정에서 힘, 민첩 따위의 고전적인 RPG 능력치가 아닌 보다 독특한 능력 선택지를 제공한다. 그러나 해당 선택지가 게임의 플레이 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꾼다고 보기는 어렵다. 각종 능력치들은 상호작용보다는 주인공 캐릭터의 인식/감각과 연관된 것으로, 대화창을 풍요롭게 만들 뿐 게임 내 사건 해결 방식 자체를 크게 늘려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전투도 없고 그렇다고 퍼즐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게임의 '전투' 자체가 사실 풀이 방식이 여러 개인 퍼즐로 볼 수 있다), 남은 것은 지도 상에 흩어진 각종 사물을 순서대로 잘 주워 모으고, 빠진 캐릭터 없이 대화를 진행함으로써 사건의 열쇠를 쥔 npc로부터 새로운 선택지가 열리기를 기대하는 일이다. 이는 80년대 유행했던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 장르 게임의 전형적인 플레이 방식이다.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연기하거나 변화를 줌으로써 주인공 캐릭터와 주변 상황을 뚜렷하게 변동시킬 수 없기 때문에, 본 작은 RPG라기보다는 고전적인 어드벤처에, 조금 더 나아가자면 읽는 순서에 조금 자유가 있는 쌍방향 소설이나 게임북에 가깝다.


간혹 괜찮은 문장이 있지만 스타일에 그친다


서사가 해체되는 탈근대를 플레이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일까? 전투도 퍼즐도 없고 상호작용을 통한 사건 해결의 다변화도 막혀있는 이 쌍방향 소설은 안타깝게도 플롯조차 허술하다. 온갖 복선과 위기감은 던져놓지만, 단서들은 이야기의 중심축을 제대로 세우지도 못하고 하나하나씩 그때 그때의 감정을 주며 소모될 뿐이다. 치밀한 설계가 없이 휘발해버리는 이야기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각종 대화를 생각 없이 즐기는 수밖엔 없다. 그리고 그 대화는 주인공 캐릭터와 그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있는 플레이어의 정신병리 및 이념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런 점에서 본 작의 장르를 최종적으로 사이코 드라마라 규정짓는 게 과하진 않을 것이다. SNS에 떠도는 각종 선동구들, 자기 과시들을 하나의 게임에 몰아놓고 적당히 채색하면 아마 "디스코 엘리시움"이 태어나지 않을까 싶다. 


예술계 전반에서 연기자-관객의 분리를 해체하려던 시도 대부분이 실패로 돌아갔고, 게임 분야에서도 많은 RPG가 과거와는 다르게 플레이어와 상대적으로 독립된 주인공 캐릭터를 제시하는 추세다(대표적으로 "위처" 시리즈). 반면 본작의 주인공은 그 어떤 게임보다도, 심지어는 울티마나 D&D 시리즈의 주인공보다도 플레이어와 밀착되어 있다. 이는 크게 두 가지 요인 때문이다. 첫째, 본 게임은 판타지이기 이전에 오늘날 현실을 반영하는 풍자극의 성격을 갖기에 주인공 캐릭터의 성향이나 상황이 덜 신비롭다. 주인공 캐릭터는 나름의 이야기를 가지고는 있으나, 정체성을 잃었다는 설정 덕분에 플레이 과정에서 플레이어가 지닌 정치적 성향이나 개성을 그대로 표현할 가능성이 극대화된다. 게다가 그런 자기표현이 주인공의 스탯으로 치환되어 게임 진행에 도움을 주기에 플레이어는 각종 성향을 드러내도록 격려된다. 그렇게 본 게임은 가상의 나-주인공이 또 다른 현실을 탐험하는 것이 아닌, 현실의 나-아바타가 가상세계를 모험하는 듯한 전복을 이뤄낸다. 


둘째로 본 게임이 지닌 메타 게임의 구조가 주인공 캐릭터와 플레이어의 결합을 강화한다. 작중에는 RPG 자체를 소재로 한 이야기가 몇 차례 제시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TRPG 주사위를 판매하는 NPC와의 대화와 더불어 일종의 MMORPG를 통해 세계 자체를 창조하려다 실패한 집단의 서사다. 이는 주인공이 자신이 플레이어블 캐릭터에 불과함을 깨닫게 되지 않을까 하는, 소위 '제4의 벽'을 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하는 묘한 긴장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런 긴장의 이면에서 플레이어는 게임의 화자부터가 사실은 주인공 캐릭터가 아닌 플레이어를 계속해서 묘사했을 수 있다는 암시에 도달하게 된다. 혹시 주인공 캐릭터의 자기 파괴는 플레이어의 정신병적 상태를 반영한 것 아닐까? 나 자신의 성향으로 인해 이 세계의 이야기가 바뀌지 않을까?


그러나 정작 게임의 종반부에서 이런 복선들은 전부 게임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맥거핀이었음이 드러난다. 주인공은 탄생의 비밀을 지닌 천사나 악마가 아니라, 플레이어의 심리적 여정에 함께하는 정신분석가가 아니라 정말로 알코올성 치매를 앓는 환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주인공과 플레이어의 심리적 유착은 다시 급작스럽게 떼어내어 진다. 의미가 무로 돌아갈 때 웃음이 터져 나온다고는 하지만 여기서 폭발하는 웃음이란 공허함에서 오는 헛웃음이다. 퍼즐 풀이의 재미도 없고, 플롯이 단순하여 이야기를 파헤치는 즐거움도 부족한 본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찾을 수 있던 유일한 가치-'고유한 나'의 재확인 가능성이 소실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한편 본 작은 정체성 묘사의 연장선상에서 주인공 캐릭터가 각종 이념을 획득하게 만들 수 있다. 차라리 대놓고 마르크시즘이라 쓰는 게 나았을 '마조프주의 사회경제학'이라든가, 페미니즘, 보수주의 등이 획득 가능한 형질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념의 숫자에 비해 진중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npc의 수 자체가 많지 않고, 각종 이념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행위가 사라져 있으며, 이념을 통한 사회 변동의 결과가 무엇인지도 명확치 않은 까닭에 이 형질들은 그저 패션으로 전락한다. 심지어 마조프주의 사회경제학은 본 작의 이야기에서 범인의 동기를 가늠하는 핵심적인 키워드가 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격이 무엇인지 명확히 드러나지 못하는 까닭에 전체 이야기가 공허해지는데 일조하기까지 한다. 그것이 블랑키즘인지 프루동주의인지 마르크시즘인지 그도 아니면 스탈린주의나 마오주의인지 아마 본 작의 감독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본작의 이념이란 플레이어가 힙하게 소비하고 스탯 향상을 위해 몸에 걸칠 아이템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해당 이념을 가졌다는 캐릭터들의 대화 내용이나 이념에 대한 게임의 설명부터가 조금이라도 진중하게 그 이념을 지지하는 플레이어라면 실소를 자아낼 수준에 불과하다.


디스코 엘리시움보다는 힙스터 데카당스라 이름 짓는 게 옳으리라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탄생의 비밀, 이념이라는 패션, 개입여지가 없는 쌍방향 소설 속 '메타' 구조, 다분히 68 혁명을 떠올리게 하는 잃어버린 적 없는 '디스코'의 기억까지 본 작은 허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 허상의 핵심에 놓여있는 것은 무기력이다. 실제 이 이야기는 일어날 수도 없으며 어떠한 의미도 없음을, 심지어는 심리테스트의 기능조차 갖지 못하고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때 그때 캐릭터 연기와 내레이션을 향유하는 것밖에 없음을 자각해가는 것이 "디스코 엘리시움"의 플레이 경험이다. 아무런 변화도 없는 세계 속 주체란 얼마나 무력한가. 그런 캐릭터가 이 세계 속에서 정말 어떤 '역할'을 맡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 무력감이야말로 오늘날 몇몇 단어를 꼬투리 잡으며 집단 자위하는 정체성 정치와, 생산을 통해 새로운 이론을 탄생시키기보다는 이론의 구성 방식을 오타쿠처럼 분석하고 앉은 '메타'의 시대의 본질이라 생각한다. 무언가가 될 수 없기에 무엇인지만 주절주절 늘어놓는, 그리고 그 내용의 대부분은 자기표현으로 고통의 전시에 불과한 지금 이 시대. 자유의 짐을 짊어지느니 노예로서 객체가 되길 택하는 나약한 자들의 시대. 그렇다면 "디스코 엘리시움"은 현시대를 '미러링'함으로써 비판하는 작품인가? 아마 그런 재전유는 본 작의 무의미한 유미주의로부터 벗어날 힘을 가진 플레이어들, 독자들의 몫일 것이다.


탈근대 자체가 사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탈근대의 퇴폐가 유독 눈에 띄는 것은 근대의 승리자들 그리고 그 후손들이 자신들이 사실 가장 큰 피해자라는 불가능한 담론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과거 유명했던 논객인 김규항은 90년대 청산주의를 회고하며 많은 지식인들이 사회주의 운동을 떠나 문화평론이라는 빈자리를 잽싸게 쟁취했다고 말한 바 있다. "디스코 엘리시움"이나 "라스트 오브 어스 2"를 향한 이해할 수 없는 고평가에 이런 자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아마 사상과 정체성을 소비 가능한 문화상품으로 만드는 것이 사회 변화의 일환이라 믿는, 노동자 대중을 예술을 향유하지 못하는 데다 비윤리적이고 어리석다 비웃는 엘리트주의자들의 행동양태가 여전하기 때문이리라. 그런 점에서 "디스코 엘리시움"은 RPG의 정말 오래된 미래라 칭할 만하다. 앞으로도 이런 유형의 작품은 끝없이 생산될 것이고, 거기 얽힌 주체들의 행태도 똑같이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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