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데드 리뎀션 2(락스타 게임즈, 2018)
"대부"나 "갱스 오브 뉴욕"과 같은 기념비적인 갱스터 영화들에 대한 통상적인 평가가 있다. 이민자 출신의 (유사)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남성이 폭력에 익숙해지고, 그 폭력이 미국이란 새로운 나라에 배태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것. 이는 갱스터 영화들이 피로 엮인 가족과, 여기에 끈끈히 협착된 폭력으로 엮인 또 다른 유사 가족을 동시에 다루기에 가능한 평가였다고 생각한다. 미국이란 국가의 두 다리인 자유와 공동체 중 바깥 일-자유를 상징하는 소재가 이른바 '사업'이라면, 내부 일-공동체를 다루면서는 가족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레드 데드 리뎀션 2"는 이런 미국식 갱스터 서사 전통의 연장선에 놓여있다. 다만 이를 서부극의 양식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 특기할만한 점이다. 서부극은 공동체보다는 자유에, 서사보다는 쾌락에 보다 방점이 찍힌 장르였기 때문이다.
"레드 데드 리뎀션 2"의 배경은 남북전쟁("갱스 오브 뉴욕", "국가의 탄생", "석양의 무법자" 등의 무대가 모두 이 내전기이다)보다는 30여 년 뒤, "대부"보다는 50여 년 전인 1899년을 바탕으로 한다. 국가가 아직 폭력을 채 독점하지 못했던 미국의 초기 건국기가 남북전쟁의 종결과 함께 서서히 막을 내리는 시기이고, 산업화가 본격화되며 노동운동이 촉발되던 때이다. 산업화는 도시의 확장을 자극하였으며 부 역시 도시로 집중되었고, 이는 경찰을 비롯한 국가와 자본의 무장 수준을 끌어올려 무법자들의 기회의 문 역시 점차 좁아졌다. 활동이 여의치 않았기에 얼마 남지 않은 개척시대식 총잡이들은 더욱 폭력적인 경향을 띠게 되는데, 레드 데드 리뎀션 2에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진 부치 캐시디의 와일드 번치 갱단이 짧지만 강렬한 활동을 시작한 것이 바로 1899년이다.
주인공 아서 모건은 반 더 린드 갱단 소속의 총잡이이자 해결사(enforcer)로 리더인 더치 반 더 린드의 유사 아들이며 오른팔이다. 갱단은 블랙워터에서 선박 강도를 저지르던 중 발각되어 대부분의 재산을 놔둔 채 핑커튼 탐정 사무소에 쫓기는 처지로 전락한다. 갱단은 서부로 도피하여 숨어 살고 싶어 하지만, 영원히 은퇴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정도의 도피 자금이 필요하다는 현실적인 문제에 맞닥뜨린다. 추적자를 벗어나면서도 '마지막 한 탕'을 위해 서쪽이 아닌 동쪽으로 자꾸만 발을 들여놓으며 벌어지는 일들이 본 작의 줄거리가 된다.
반 더 린드 갱단은 매우 다채로운 면모를 띤다. 첫째, 이들의 주 수입에서 볼 수 있듯 이들은 범죄 조직이다. 살인, 강도, 사기 등 온갖 중범죄를 저지른다. 둘째, 이들은 유사 가족이다. 총잡이나 좀도둑 외에도 목사, 매춘부, 요리사, 고리대금업자 등 다양한 직종, 연령, 성별의 사람들이 함께 몰려다니며, 아이를 함께 기르는 등 서로를 단순한 동료를 넘어선 그 무엇으로 인식한다. 이는 라이벌인 오드리스콜 갱단이 구성원을 대하는 태도와의 대비나, 스토리 중 납치된 갱단의 아이를 구하러 가는 장면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셋째, 이들은 사상 집단이다. 리더인 더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그 의미를 모호하게만 이해하고 있으나, 이들은 일종의 무정부주의를 기치로 내세운다. 부의 폭력적 재분배, 도시화 거부, 공동체에 대한 자발적인 기여, 국가와 자본에 대한 반감, 반인종주의 등이 이들이 지닌 사상의 중심이다. 단순 악행에 대한 합리화로 여기기에는 작중 갱단은 이 사상에 가능한 충실하고자 하며, 구성원들은 이런 가치관에 벗어난 행동을 함으로써 유대와 확신을 점차 잃어가는 모습을 보인다.
반 더 린드 갱단이 지닌 사상 집단으로서의 측면에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장치가 개척시대 무법자들의 행동양식을 단순한 부나 쾌락의 추구가 아닌 가치관 중심의 시점으로 재해석하는 기제여서만은 아니다. (결국 기독교 서사로 되돌아가기는 하지만) 그들의 무정부주의는 공동체의 주요 사상이 기독교였던 과거 미국 서사의 전형성을 벗어나는 상상력을 제공한다. 무엇보다 이렇게 부각된 사상은 이들이 공동체를 기반으로 자유를 획득하려는 시도가 의도적이고 합목적적임을 강조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자유-공동체-정의를 하나로 엮는 일관된 논리가 이들에게 존재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끈이 헐거워지고 결국 해체되어 주인공에 의해 새롭게 이해된다는 것. 바로 이 부분에서 본 작이 자유-외부 논리와 공동체-내부 논리의 모순을 넘어서 "정의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실현 가능한가?"를 묻는 이야기로 한 단계 상승하게 되는 것이다.
더치는 스스로를 선하고 온전한 존재로 납득하고 인정하므로 자신의 행위에 따르는 사소한 결함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오직 타인을 의심할 뿐이다). 그는 모세처럼 이끄는 자이고, 그러므로 탈출 계획을 세운다. 그는 굳건하며 공동체를 지키는 아버지이다. 반면 아서는 흔들리고 시험을 겪는다. 그는 자기 자신을 의심하고 스스로를 소모시키는 병-폐결핵(consumption)을 앓고 쇠하여가며, 미래-계획에 반대하여 지금 현재-속죄를 주장한다. 그는 더치의 아들이지만, 공동체를 살리려는 어머니이기도 하다. 그는 예수처럼 희생한다. 이들이 갱단을 바라보는 시선을 정리하자면 지켜야 할 대상이자 외부에 적대하여 단결한 집단으로서 공동체와, 돌봐야 할 대상이자 모두를 살찌우는 '살림'의 주체로서 공동체로 엇갈린다.
외부의 폭력적인 자유-마르크스 식으로 표현하자면 굶어 죽을 자유-에 맞서 그 폭력을 그대로 되돌려주는 것이 더치의 입장이자 자유라면, 아서는 자유의 의미를 완전히 변화시킨다. 그에게 자유란 짧은 인간의 삶에서 어떤 인간으로 기억될지 선택할 수 있는 실존적 의미의 자유이다. 그는 더치식의 자유를 마음껏 향유한 끝에 점차 황폐해지는 사람들을 발견한다. 무법자들의 전성기가 끝나고 야생이 점차 사라지는 자본주의적 자유의 시대에, 더치식의 폭력은 일견 구조에 맞서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구조적 억압의 안티테제로서 잘 포장된 테러리즘이나 반달리즘에 불과한 것이다. 아서는 신체적 자유를 사적/공적으로 거의 다 잃어버린 끝에 생각의 자유를, 선택의 자유를 얻는다. 누군가를 도와 삶을 계속하게 하는 것. 누군가 자기처럼 새로운 시작을 누릴 기회를 주는 것.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정의이자 자유의 참된 의미다. 과거의 나라는 습관으로부터 벗어날 자유가 누구에게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공동체와 자유에 대한 더치와 아서의 입장이 이렇게 갈렸기에 아서는 많은 고전들이 그렇듯 살부(殺父)에 이르거나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는가? 그리고 결국 죽은 아버지를 답습하며 새로운 지켜낼 국가를 건설하는가? 아니다. 아서는 위태로운 한 가족을 자신의 희생을 통해 보듬을 뿐이다. 해석에 따라 다르게 읽을 수 있으나 그는 끝내 정당한 복수의 대상조차 죽이지 않는다. 애초에 그 자신이 응징당해 마땅한 자였으나, 인간의 보복이 아닌 신의 징벌-결핵으로 심판받지 않았던가? 그는 재판관이 되는 오만을, 더 많은 악의 순환을 거부하고 오롯이 타인을 위한 행위로써 대속(代贖, redemption)을 선택한다. 그가 그렇게 구해낸 가족은 더치가 말했던 마지막 한 탕 없이도 스스로의 노력과 선행만으로 다시 한번 살아갈 기회를 얻는다. 후일 구원받은 가장 존 마스턴이 아서의 복수를 대행하다가 추적자들의 눈에 띄게 되어 결국 죽임 당하는 것이 전편의 내용인데, 이조차 본작의 주제를 더욱 강화함을 알 수 있다.
지나간 날은 되돌아오지 않고, 입은 상처는 낫지 않으며, 이미 저지른 악행은 보상될 수 없다. 용서는 불가능하다. 많은 이들은 그렇기에 변화의 무용함을 주장한다. 지금 와서 선한 행동을 한다고 아무것도 내게 주어지진 않는 것이다. 그나마 인간의 원죄는 단 한 번 저질러졌기에 예수는 역시 한 번 죽는 것으로 그 죄를 대신 질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일상에서 밥 먹듯 타인을, 다른 생명을 착취하고 가해하는 우리보다 예수의 처지가 구원의 측면에선 나은 것 아닐까? 우리는 조금이라도 윤리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아서는 여기에 긍정적인 대답을 내리지는 못한다. 하지만 용서나 보상이 가능하지 않음을 알았기에, 그는 무엇도 바라지 않을 수 있었고 지속되는 시간 속에서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하고자 '용맹정진'하였다. 그 결과 아서 모건은 많은 사람들을, 어쩌면 자기 자신까지를 구하여 선한 벗으로 기억되기에 이른다. 자유와 공동체를 잃었기에 자유와 공동체를 얻을 수 있었다는 역설이다.
본 작을 오픈월드 RPG 게임으로서 고평가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일부는 그렇지만 일부는 아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캐릭터의 선악을 평가하는 카르마 시스템은 허술하고, 플레이어의 행동에 따라 게임의 사건이나 시간이 크게 변화하지도 않는다. 맵은 넓지만 생각보다 즐길거리는 부족하며, 무기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실제 사용 시 효과는 대동소이하다. 개인적으로는 상호작용 요소도 별로 재미있다고 느끼진 못했고, 퀘스트도 반복 요소가 생각보다 많은 데다 서브 퀘스트의 스토리도 단순한 편이다. 컨트롤은 상당히 불편하고 뻑뻑하다. 제작 시스템도 최근 게임들에 비하면 구색만 갖춘 수준이다. 명암이나 사운드 크기에 불편감을 느끼는 플레이어들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환상적인 미국의 자연경관을 네이티브 어메리칸 추장과 함께 내려다보고 있자면 그런 소소한 부족함은 많이 잊힌다. 이 게임은 어쨌든 서부에서 플레이어가 해보고 싶었을 행위들을 대부분 구현하고 있으며, 소위 풀 프라이스 게임이 갖춰야 할 많은 것을 골고루 기본 이상 갖추고 있다. 병들고 쫓겨 쇠락해가는 주인공과 갱단의 섬세한 묘사는 압도적인 몰입감을 선사하여 플레이어의 감정이입을 용이케 한다. 들꽃처럼 여리고 고운 아서의 일지를 읽고 연민하지 않을 이 누가 있으랴. 간혹 구태의연한 연출이 있으나 대다수의 연출은 영리하며 주제의식에도 부합한다. 갱단이 흩어지고 난 후 온갖 고초를 겪고 거점지로 돌아오던 때(chapter 5), 작중 내내 이어지던 고요를 깨고 시나브로 흘러나오던 배경음악에 전율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여성 참정권 운동과 인종차별, 선주민에 대한 묘사는 조금 평면적일지언정 과거 서부극의 클리쉐를 박살내고 정의를 구현하는 쾌감이 있다. 말 고환의 크기가 온도에 따라 변화하는 차원의 디테일과 다종 다양한 가축, 야생동물의 도감은 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술성과 흥행성을 겸비했다는 점에서 본 작의 완성도는 개인적으로 다른 게임의 그것과는 수준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호사가들이 "라스트 오브 어스"를 게임계의 "시민 케인"이라 부른다면, 나는 "레드 데드 리뎀션 2"는 "대부" 정도로는 불려야 한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간 걸작으로 불리는 많은 게임들이 있었지만 그들 중 대다수의 이야기는 소위 말하는 '순수 예술'의 수준은 아니었고, 짜임새가 있는 경우에도 특정 장르의 문법 아래서 평가할 때 훌륭한 정도였다. 반면 예술성이 있었던 게임들은 투자 규모나 흥행 면에서 부족한 경우가 많았고, 현실적인 연출상의 제약으로 인해 도리어 지나치게 난해한 주제를 풀어놓고는 했다.
"레드 데드 리뎀션 2"는 많은 미국 예술작품들의 고전적 주제-자유를 위해 죽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생동감 있게 보여준다. 반 더 린드 갱단은 미국이란 나라(오늘날 미국의 영향력을 고려하자면 지금 현재 이 세계)가 어떤 고민과 유혹, 쾌락과 죄책감 속에서 세워졌는지를, 미국인이 생각하는 아메리칸드림이 무엇이고 프런티어의 실제 내용이 어떤 것인지를 투영하는 상징이다. 이미 많이 반복된 주제와 닳을 대로 닳은 장르 속에서 흥미롭게 다시 읽을 우리의 이야기를 제시했다는 점, 공동체/자유/정의에 대한 적확한 질문과 타당한 대답을 내린다는 점에서 본 작은 새로운 고전의 반열에 접어들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