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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님 Dec 15. 2023

헤어질 때 인사는 짧게

부모님 대신 언니!

연로하신 부모님을 만나 뵙고 돌아갈 때 가슴 저미는 울컥함을 다독이는 게 힘든 일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뵙고 헤어지는 고통에서만큼은 벗어

나겠구나.' 하는.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방학이 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부모님께 가는 것이었다. 방학을 위해 세워둔 계획도 많지만 나보다 더 방학을 기다리시니 어쩔 수 없었다.

나를 보자마자 "에구, 앙증맞은 것" 하시는 아버지. 나이 삼십이 넘은 딸에게 그런 말씀이 나오실까.


낫을 숯 돌에 간다. 낫의 날이 제대로 섰는지 엄지

손가락으로 살짝 밀어 보니 잘 갈아진 듯 깔깔하다. 낫과 바구니를 챙겨 밭으로 간다. 밭두렁의 풀들이 어우러졌다. 앞 두렁 풀부터 착착 베어 나간다.

두렁에 심어 놓은 호박과 오이 줄기들이 풀과 뒤엉켜 열매가 열렸다해도 못찾고 누렇게 익어가게 생겼다. 실타래를 풀어가듯 조심조심 풀만을 골라 베어내다 아차차, 그만 호박덩굴까지 베고 말았다. 호박 한 두 개는 못 따먹게 되었다. 세워준 지지대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오이 하나를 따서 옷에 쓱쓱 문질러 베어 문다. 담백하고 향긋한 즙이 입

안 한가득이다. 남은 오이 꼭지는 멀리 힘껏 던진

다, 풀 베느라 굳어진 팔운동도 할 겸. 윤기로 반

짝이는 가지도 하나 덤으로 먹는다. 겉은 진보라

색이지만 속은 하얗고 촉촉한 것이 부드럽다. 가지의 머리 부분을 감싼 꼭지를 벗겨 낸다. 자신을 보호하겠다고 앙탈을 하듯 붙어 있는 가시가 귀엽

다. 꼭지까지 먹고 나면 가지의 아릿한 맛에 혀를 내밀어 숨을 들이쉰다.


얼마나 야무지게 풀 제거가 되었을까마는 어머니는 “속이 시원하다.”라는 말씀을 몇 번이고 하신다.

그리곤 “너만 오면 몸살이 난다.” 시며 자리에 누우

신다. 그동안 많은 일에 지쳐있던 어머니께서 일꾼 같은 딸이 오니 긴장이 풀리신 모양이다. 조금이라도 일을 덜어드리고 가려는 마음에 이불 빨래, 청소, 돼지우리 쳐내기 등의 집안일과 들일

들을 찾아 해 놓는다. 돌아갈 때가 문제다.

부모님이 또 어떻게 지내실지 불 보듯 훤하니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대문 밖까지 따라 나오시는 두 분을 말간 눈으로 볼 수가 없다. 가슴의 소용돌이에도 태연한 척 얼른 출발해서 부모님이 보이지 않은 곳까지 나와 멈춘다. 자동차의 안전띠를 매고 눈물을 쓱 닦고 거울 한번 보고 심호흡을 한 후 다시 출발한다. 이건 부모님 집에 올 때마다 도지는 헤어짐 병 같은 것이다.

우리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온다. 책이 어디 있느냐, 무엇이 어디 있느냐는 말씀이다. 당신 나름 놓아두는 방식이 있는데 청소한답시고 다 흩트려 놓아서 찾을 수가 없다고 역정을 내신다. 나도 발끈한다. 종이 조각 하나 안 버렸다고, 어디 어디를 보시라고, 제발 정리 좀 하시라고. 언제 눈물 바람을 하며 애절하게 돌아

왔나 싶다. 그러고는 몸도 마음도 지쳐 며칠 몸살을 앓는다.     

 

부모님이 안 계시니 고향도 없어진 것 같다. 방학이 되면 부모님 대신 고향 집 가까이에 사시는 큰언니

댁으로 간다. 부모님이 계실 때는 몰랐다. 언니에게

서 또 런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줄...   

그 헤어짐 병이 나를 따라온 것인지, 미리 와 있었

던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어이없게도 언니와 형부가 이어받으신 것이다. 농산물을 바리바리 싸서 실어 놓은 자동차의 키를 누르며 한마디 한다.

"나리꽃이 참 예쁘게 폈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혼잣말을 한다. 미리 하는 마음 다스림이다.

헤어질 때 인사말은 될수록 짧게 한다.

"또 와."

"네. “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답하지만, 표정은 일 그러

졌을 것이다. 서로가 그렇다. 남는 이나, 가는 이나.

여전히 두 분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까지 나와서 차를 멈춘다. 마음도 운전도 재정비하여 다시 출발

한다. 언니와 형부의 연세가 들어갈수록 애달픔은 더 깊어진다. 열세 살 위인 언니가 부모님 대신으로 자리 잡고 계시는 것이다.

내 나이가 더 들면 부모 입장이 되어, 또 자식과 헤어짐으로 눈물이 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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