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자식을 읽는다.
"엄마, 이 정도면 돼요?"
"응"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요?"
흠칫 귀가 쫑긋해진다.
무심히 잠자고 있던 내 안의 소리가 깨어 일어난 것 같았다.
셋째 언니와 언니 아들인 조카가 김장을 하며 나눈 대화였다.
주방에 있던 나는 김장하는 곳의 소리만 들릴 뿐 상황을 알 수 없었다.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절인 배추에 양념을 이 정도 넣으면 되느냐는 조카의 질문에 대한 언니의 대답이었다.
김장을 하다 보면 양념이 남거나 배추가 남거나 하여 두 가지의 비율을 맞추려면 많은 경험과 눈썰미가 필요하다. 언니는 배추의 양과 아들이 넣고 있는 양념의 양을 보고 1:1 비율이 맞아떨어질 거라는 것을 이미 한눈에 읽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어렸을 적에 조카와 같은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다.
내가 묻는 말에 어머니는 어떻게 보시지도 않고 '응' 하시냐고.
밭에서 풀을 맬 때의 일이다.
" 어머이, 이거 풀이예요?“
”응“
"뽑아요?”
"응"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하시니 정말 알고 대답하시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대로 두어야 하는 작물인지
뽑아내야 할 풀인지 확신이 없어 난감하기도 했다.
하지만 뽑아낸 것이 다 풀이긴 했다. 이미 내 주변에 잡초만 있다는 것을 어머니는 알고 계셨던 것이다.
어머니는 먼저 보낸 아들에 대한 아픔과 육 남매 양육 등의 힘겨운 삶에 시시콜콜 설명해 줄 마음의 여유가
없으셨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는 내가 이러든 저러든 관심이 없으시다 생각되어 섭섭한 마음으로 기울어졌다.
언니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두세 살 무렵 내 허리에 보자기를 묶어주며
"고추 찾아와라" 하면
고추를 찾는다고 방안 이곳저곳을 뒤지고 다녔다고 한다.
'아들을 원하신 건데 내가 태어난 거지. 내리 딸 넷에 막내딸이라니 엉덩이 깨나 맞았겠다.' 싶었다.
또 아버지는 나를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고도 하셨다.
심지어 다리 밑에 가면 네 친부모가 있다고 하시기까지.
놀리는 것으로 듣긴 했다.
그런데 내 얘기에 집중하지 않는 듯 대답하시는 어머니를 보면, 어쩌면 내가 정말 다리 밑에서 주워 온 데다 여자아이여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어머니께서 내게 무심하게 대충대충 대답하시는 이유가 아닐까?
마음속에 엉뚱한 소설을 쓰고는, 이야기 속의 불쌍한 주인공인 양 샐쭉했던 한때의 기억이 나서 웃음이 났다. 언니들의 사랑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었다면 갈등은 더 오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요?’
어머니들은 다 아는 것 같다.
스윽 지나는 눈길만으로도 자식의 움직임, 생각, 질문의 의도까지 읽히는 것이다.
언니도 어느덧 그런 경지에 이른 건가 보다.
이번 김장 덕에 내 마음속에 깊숙이 들어앉아 있던 안개 같은 의문이 걷히는 것 같아 내 기분은 맑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