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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향 Jun 30. 2021

황소윤과 영지 선생님

여자 어른이 필요한 소녀들

 퇴근하고 누워서 유튜브를 보다가 새소년의 황소윤이 중학생 아이 두 명을 각각 앞에 두고 반투명의 커튼 사이로 이야기를 하다가 음악을 들려주는 영상을 보게 되었다. 아이들은 중학생이 되었지만 코로나로 인해 교복을 한 번도 입지 못하였고, 2020년의 봄이 아이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학교 생활에서 고민되는 것은 무엇인지를 황소윤에게 이야기했다. 황소윤은 희미해졌을 게 분명한 자신의 어린 시절을 열심히 떠올리며 그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었고, 난춘이라는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고 하였다. 그 순간 아이와 황소윤 사이의 커튼이 열리며 밴드가 등장했고 황소윤은 노래를 했다. 우리 오늘을 살아내고 내일로 가자, 라는 가사의 난춘(어지러운 봄)을. 소녀는 새로운 세계를 만난 순간의 아이 특유의 경이로운 눈으로 공연을 보았고, 나는 울었다. 소녀에게 이 경험이 얼마나 특별할지, 소녀는 아마 저런 여자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겠지 싶어. 그런 대상을 너무나 바라 왔고, 마침내 찾았을 때 나의 마음이 기억나서.


늘 외로웠다. 스스로를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이상한 아이라고 여겼다. 공부를 잘해 학교 선생님들의 관심을 받았지만 본질을 이해받는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인디음악을 좋아하고, 인권에 관심이 많고, 어른들이 환경 문제에 무관심해 화가 나있는 나를 이해받고 싶었다. 어른들은 나를 유난한 아이라고 여겼고, 공부를 잘하니 일단 공부를 하라고 달랬다. 알에 갇혀있는 기분이었고, 누군가 나의 알을 깨고 너는 훨훨 날아갈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해주길 기다렸지만 아무도 없었다. 인터넷으로 좋아하는 여자 뮤지션들의 인터뷰를 찾아 읽으며 그래 세상엔 이런 사람들도 있지, 하고 나를 달래던 어느 날 과외 선생님이 나타났다. 정확히는, 수학을 못하는 이과생이었던 내가 엄마에게 졸라 고용한 결과였지만. S대 물리학과 대학원생이던 선생님은 처음으로 내가 하는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는 어른이었다. 그녀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환경 포럼의 종류, 나처럼 인디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들의 이야기, S대에는 사이코드라마 수업과 마당극 동아리가 있다는 것, 동아리방은 청춘영화가 아닌 참이슬 공병이 쌓여있고 숙취에 시달리는 공대생들이 누워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그녀는 지금의 너에게 필요한 책인 것 같다며 전혜린의 책을 선물해주었고, 피곤한 날에는 과제를 가져오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해도 모른 척 넘어가 주었다. 선생님 같은 어른이 되고 싶어서 공부를 했다. 대학에 붙었다고 연락을 했을 때, 축하한다며 홍대입구역으로 불러 사주었던 돈부리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칵테일들이라며 시켜준 네 잔의 칵테일은 아직도 가장 좋아하는 음식과 음료들이다. 잘생긴 후배와 소개팅을 시켜주겠다고 하더니 돌연 미국으로 박사를 하러 가버려 이제는 연락이 끊긴 그녀지만, 여전히 그녀가 그립다. 가장 필요한 시기에 나타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묻는 내게 오늘은 견뎌내고 내일로 가면 이런 세상이 펼쳐져있다고 보여주던 그녀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과는 다른 어른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녀는 사라졌지만, 나의 마음속에 살아있다.


평생 불안한 나를 이해받기를 원하며, 앞으로 펼쳐질 세상을 보여주는 사람을 찾아다니던 소녀시절을 지나왔다. 이제는 “나에게도 빛날 날이 올까요?”라고 묻는 소녀들에게 세상은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곳이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랑을 충분히 받은 사람만이 사랑을 줄 수 있다고 하던가. 충분히 받았고, 그 사랑은 내 안에 남아 나의 일부가 되었다. 이제는 불안하고 외로웠던 어린 시절의 나에게 나눠줘야 할 때이다. 은희에서 영지가 되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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