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을까. 내가 눈치 보는 글을 쓰고 있었다.
이렇게 쓰면 사람들이 어떻게 볼까, 저렇게 쓰면 너무 이상한가.
원래 나는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 글을 쓴다는 자각 자체가 없었으므로 다른 사람이 읽을 수 있다는 고민도 하지 않았다. 초등학생일 때 일기를 써내면 담임선생님이 읽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그저 내 속에 있는 모든 말을 있는 그대로 썼다. 웃긴 점은 집에서 엎드려 일기를 야무지게 쓰던 나와 학교생활을 하던 나는 영화 속 이중생활을 하는 주인공만큼이나 달랐다는 것이다.
담임선생님은 매우 내성적이고 소심한 학생이던 내가, 사실은 그렇게 활발하고 새침하게 불평불만을 떠드는 아이일 줄은 전혀 몰랐을 테고, 일기 속의 나와 학생인 나의 갭에 엄청난 놀라움을 느꼈을 것이다. 물론 그때의 나는 담임선생님이 느낄 감정 같은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열심히 일기만 썼다. 그런데 담임 선생님이 내 일기를 칭찬하며 첫 줄을 반 아이들에게 읽어줬을 때의 당황과 수치란. 갑자기 내 속이 까발려진 느낌이었다.
선생님이 읽은 그 문장은 바로 우리 학년이 애버랜드에 놀러 갔을 때의 심정을 적은 글이었다. 나는 아마도 첫 문장을 애버랜드에 놀러 갔는데 비가 와서 짜증 났다는 식으로 썼을 것이다. 문제는 학교에서의 나는 짜증 낸 적 한 번 없는, 숫기 많고 표정 없는 학생이라는 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본성이 까발려지게 되자 나는 부끄러우면서 동시에 선생님의 칭찬에 기분이 좋은 것도 같은, 수치스러우면서 오묘한 감정을 느꼈다.
아무튼 그쯤 돼서야 나는 내가 얼마나 필터링 거치지 않은 일기를 쓰고 있는지 조금 실감하게 됐다. 그렇다고 내가 갑자기 일기 쓰는 스타일을 바꾼 것 같지는 않다. 나는 고등학생 때 내던 활동보고서에도 내 감정에 대해 거침없이 썼고, 성격은 좀 다르지만 대학생 때도 내 주장에 대해 큰 포장 없이 잘 썼다.
아마도 문제는 바로 이런 플랫폼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였을 것이다. 솔직히 내 스타일의 글은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 날카롭고 강하고, 또 어떤 면에서는 오글거리는 감정을 느끼게 할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초반에 글을 조금 쓰다 말곤 했다. 어느 순간 내 글이 부끄럽게 느껴진 것이다. 거침없던 초등시절과 다르게 성인이 된 나는 내 글을 계속해서 검열하고 있었다. 내 감정을 솔직하게 쓰는 것이 꺼려지고, 어차피 이런 글은 인기도 없을 거라며 미리 비관하고, 쓰고 싶은 주제가 아닌 글을 올리곤 했다. 갑자기 착한 척, 순한 척을 하며 말을 순화하고 이모티콘을 쓰고 특수기호를 붙이더 나. 하지만 그런 글은 오래가지 못했다.
글을 쓸만한 동기가 생기지 않았다. 쓸 이유도 없을뿐더러 글 쓰는 게 더 이상 재밌지도 않았다. 무슨 글을 써야 하는지 알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브런치에서 브런치 북 출간 프로젝트라는 것을 알게 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눈치 보면서 내 글에 대한 두려움을 키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단 한 번도 발행하지 않고 브런치 북을 완성했다. 그렇게 무사히 브런치 작가도 되고 브런치 북도 만들고 출간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그러고 나자 이제 정말 작가로서 활동할 때가 다가왔다. 무슨 글을 쓸지 이미 정해놨지만 이런 글을 써도 될까 하는 비관이 또 스멀스멀 올라왔다. 무겁고 어둡고 평범한 이 글을 써도 될까. 이 글이 무슨 도움이 될까.
브런치 북을 냈지만 여전히 눈치 보는 내가 있었다. 그래서 그냥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쓴답시고 이 글을 작성하고 있다. 이 글이 아마 처음으로 발행하는 글이 될 것이다. 이대로가 좋다. 일기 쓰는 것을 좋아하던 사람은 일기나 써야지. 사실 내가 쓰려고 했던 것도 과거의 잔상에 대한 것이니 과거의 일기나 마찬가지라고 내 맘대로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