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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질씨드 Jun 07. 2022

정리된 작업실은 우리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 준다

작년 12월 말, 재봉방에 걸려 있었던 패턴들을 거의 1년만에 정리했다. 프린트해서 테이핑만 겨우 해두고 마음이 바뀌어서 채 자르지도 않고 걸어둔 원피스 패턴, 몇 번에 걸쳐 다시 그린 후드 패턴 쪼가리들, 엄마와 나의 기본 티셔츠를 만들려고 세 가지 사이즈에다가 갖가지 길이의 소매까지 만들어둔 티셔츠 패턴들. 어지럽게 걸려 있었던 수십 개의 패턴들을 갈무리하여 A3 클리어 파일에 차곡차곡 정리했다.



그처럼 많은 패턴들이 걸려 있었던 이유는 작업이 멈춤 상태였기 때문이다. 작업은 멈췄는데 욕망은 자꾸자꾸 자라났기 때문이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겨나는 욕망들이 구현되지 못한 채로 어느 단계에서 멈춰 있었기 때문이다.


어째서인지, 생업이 바빠 옷 만들 시간이 없다면서도 패턴은 짬짬이 베꼈다.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좀이 쑤셔서 견딜 수 없었다.


사실 진짜 복잡한 것은 패턴 작업 이후부터다. 지금 당장 무엇을 만들 것인가. 그건, 만들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은 내게 언제나 굉장히 어려운 결정이었다. 이상하게도 수많은 선택지 중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 오래 걸리거나 패턴이 없거나 패턴 수정이 복잡하거나 원단이 없거나 제철이 아니거나 등등 — 작업에 가장 마음이 갔었다.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가면서 진행하기엔 에너지의 여유분이 없었으므로, 패턴들은 옷으로 만들어지지 못하고 1년 가까이 쌓이고 방치되었다.


언젠가부터 방법을 바꾸기 시작했다. 가장 현실적인 — 원단이 있고 쉽게 빨리 만들 수 있고 곧바로 입을, 게다가 꼭 필요한 — 작업을 붙들고 하나씩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해나가기 시작했다. 그 동안의 공백으로 너무 큰 갈망에 시달리다보니 마음이 좀 착해진 것 같았다. 딴청 부리지 않고, 싫고 좋음을 크게 따지지 않고 순리를 따르는 것, 그것이 착함의 정의가 아니겠는가.


순리와 순서에 따라 깔끔하게 작업한다는 것은 작업자의 도리요 행복이다. 쓸모 없어진 패턴들을 버리고 당장 사용할 패턴들을 눈에 띄게 걸어놓고, 보관할 것들은 클리어 파일에 끼워 넣었다. 주인공들이 서로의 역할에 맞게 구분되어 제 자리로 돌아간 작업실은 그 전의 작업실과는 더 이상 같지 않았다. 언제 다음 작업에 착수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것만은 분명했다.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


그 증거로, 벌써 당장, 골치를 썩이던 두 가지 일이 해결되었다. 그것도 재봉 분야가 아니라 생업 분야에서. 연말을 조금 더 행복하게 보내는 방법이 거기, 내 작업실에 있었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부터 나는 진지하게 바느질에 대한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다. 오래 전부터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작업 노트처럼 쓰고 있었던 블로그의 글들을 다시 찬찬히 읽어보고 수많은 사진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작업 기억력이 짧았기에 잊지 않기 위해 메모해두었던 노트들이었고, 온라인 바느질 친구들과 소통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할 수도 있었을텐데, 이상하게도, 언젠가는 반드시 그 노트들을 바탕으로 뭔가를 써야 할 것 같았다. 바느질을 하고 있자면 하고 싶은 말들이 차고 넘쳤다. 작업 노트 형식에 담아낼 수 없는 말들이 고이고 있었다. 뭔가 새로운 형식이 필요했다.


2021년 12월 31일, 나는 해를 넘기지 않으려고 서둘러 브런치 작가에 응모했지만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실망스러운 마음에 글쓰기를 계속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났을 때, 나는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일을 시도해보았다. 그것은 옥상에서 빨래를 말린 일이었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상이었을 일이지만, 팬데믹으로 집에 갇혀 있었던, 가사노동을 족쇄처럼 여기던 지식 노동자에게는 뜻밖의 사건이었다. 쪽빛 하늘 아래 병풍처럼 펼쳐진 북한산을 배경으로 깃발처럼 펄럭이는 빨래가 너무 아름다워 수많은 사진과 동영상을 찍었다. 찍어둔 사진들을 어딘가에 공개하고 싶었다. 할 말이 많았다. 나는 당장 빨래를 말린 3일간의 기록을 써서 또 다시 브런치 작가에 응모했다. 이번에는 합격이었다. 


10개월이 지난 지금, 그 때부터 계속한 글쓰기로 브런치북을 만드는 데까지 왔다. 나는 아직도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최초의 원동력이 작년 말의 재봉방 정리였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길을 잃고 멈춰 있었던 나만의 프로젝트에, 뭐가 될지 알 수 없지만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준 사건이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생업이 바쁘고 생활이 빠듯한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변한 것이 있다면 바느질을 멈춰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멈춤이 많은 프로젝트지만 지금 멈춰 있다고 해서 끝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매번 새롭게 다시 시작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 글들은 어렵사리 지속하고 있는 나만의 작은 프로젝트에 대한 기록이자, 지속을 위한 정리 작업이다.


(2022. 10. 29.)


내 원단장 캐비닛에는 언제나 패턴들이 걸려 있다. 비록 오랫동안 멈춰 있을 지라도.


[이 글은 21년 12월에 쓴 글을 22년 10월에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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