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좋아하는 아들이 흔쾌히 응해서 독서일기를 쓰고 엮어본 게 벌써 4년 전의 일이다. 혹독한 사춘기를 지나고 지금은 조금 여유로운 마음으로 보이지만 고1이 여유로워봤자 얼마나 여유로울까? 같이 독서모임을 하자고 몇 번 응했지만 모두 단칼에 거절당했다. 거절이 당연한 거지 하면서도 못내 이렇게 훌륭한 독서모임리더를 써먹지 못하는 아들이 안타깝기도 했다. 그래도 엄마와 고등학생 아들이 독서 모임을 한다는 건 내 정서에도 무리로 보여 서운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번엔 새로운 제안을 했다.
- 엄마랑 독서 모임 콜?(당연히 밑밥이다.)
- 놉
- 그럴 줄 알았어. 근데 영화는 괜찮지 않아?
- 엥? 영화? (입질이 왔다!)
- 응. 엄마가 생각하기에 책보다도 좋은 영화들이 많은데 네가 안 본 것도 많을 것 같아서.
- 생각해 볼게.(이건 대단히 긍정적인 반응이다.)
- 하자~! 그냥 내가 좋은 영화 추천하면 네가 응하는 걸로 일주일에 한 편! 어때?
- 음,,, 그래. 근데 절대 영화 끝나고 질문이나 대화하기 없기 약속하면!
- 콜(낚였어!)
그렇게 자칭 '고딩아들과 무비무비'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어제가 첫 만남이었다. 첫번째 영화부터 묵직하면 그날로 취소할 게 뻔해서 최대한 가볍게 보려고 성룡의 [80일간의 세계 일주]를 골랐는데 DVD 오류로 머뭇머뭇대니까 아들이 그냥 다른 영화로 보자고 해서 같이 고른 것이 [동주]였다. 아들이 그냥 보지 말자고 할까봐 얼마나 조마조마 했던지...
아들은 역사에 기반한 영화를 원했다. 그래서 <80일간의 세계 일주>도 고른 거였다. 영화 속에 다양한 시대상이 들어가 있는 영화이니까 말이다. 언젠가 다시 시도해볼 참이다. <동주>는 아들도 제목만 들어봤지 단순히 시인 윤동주의 삶에 대한 영화이거나 독립운동 이야기인가 정도로만 짐작했다. 나 역시도 이 영화가 개봉된지가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수업 준비를 하면서 부분적으로 만난 게 전부다. 윤동주문학관도 다녀오고, 윤동주 책도 여러 권 읽고, 좋아도 하는데 이 영화는 왜 피했을까? 아마 아이들을 낳고 영화보는 생활 패턴을 모조리 없애버린 탓일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렇게 만난다, 아들 덕분에.
영화 <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음을 앞두고 총독부 형사의 심문을 받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이 심문 과정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영상화한 것이 윤동주와 송몽규가 청소년 시절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겪은 삶의 여정이 된다. 그 삶에는 시와 독립 무엇보다 인간됨에 대한 열망이 가득하다.
아들은 대화와 질문을 거부한다고 했지만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기회를 노리며 작은 질문들을 던졌다. 가령,
- 난 저 시대에 태어났으면 어느 쪽이었을까?
- 엄마 난, 독립 운동은 못 했을 거 같아. 친일을 했을 지도 몰라.
- 그래? 나도 자신은 없어. 친일까지는 아니어도 창씨개명 했을 것 같고, 요리조리 피해가면서 살았을 지도 모르겠어. 그치만 앞장 서서 나쁜 짓을 하지는 않았을 거고, 독립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마음 속으로나마 돕고 싶었을 거 같아.
- 그건 그렇지. 저 시대에 창씨 개명을 하고 친일적이라고 해서 맹목적으로 비난하면은 안 될 것 같아.
- 그래, 그들도 사정은 있었겠지. 하지만 말이야. 부끄러움은 갖고 살았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렇게 영화가 한참을 흘러가고, 송몽규의 적극적인 독립 운동에 비해 윤동주는 과연 독립 운동가로 불리는 것이 맞는 건가 싶게 시만 좇는다. 그러다가 교련 수업을 회피했다는 이유로 모욕을 당하고, 송몽규에게 돌아간다. 그곳에서 그는 바로 그 '부끄러움'을 느낀다. 자신을 무력독립운동에서 배제하려는 몽규와 친구들을 보며 그때서야 비로소 마음 속에 독립운동의 열망이 생긴 건 아닐까? 그때 낭송되는 시가 <쉽게 쓰여진 시>이다. 도덕 시간에 '성찰'을 배울 때 내가 자주 인용하는 시이다. 그간 업무적 용도로만 이 영화를 이용한 나를 부끄러워하면서 보았다.
이 영화의 핵심 키워드는 '부끄러움'라고 생각한다. 핵심 키워드가 '독립운동'이라고 하면 이 영화의 주인공은 윤동주가 아니라 송몽규가 될 테고 영화 재목도 <몽규>가 되어야 하니까. 따라서 우리가 현재 '천재 시인'이라던가 '독립 운동가'라고 윤동주를 부르는 것을 아마 그는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 어느 것도 뜻대로 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던 시대에 태어나 꿈을 꾼다는 것만으로도 죄스러웠을 텐데, 사촌 몽규는 나라의 독립에 삶을 걸었는데 서정시를 술술 쓰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 자랑스럽진 않았으리라. 후대의 평가와는 무관하게 말이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당시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그 당시를 겪은 이들에게 빚을 졌다는 말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태어났다면 비록 독립운동을 못한 채 비굴한 삶을 이어갔을런지 몰라도 내내 부끄러워하며 살았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따라서 그 당시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살았던 사람들이 지금도 뻔뻔하게 사는 세상이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저 하나 당시에 목숨을 건지며 뻔뻔하게 살았으면 그걸로 만족해야지 그때에 얻은 영화를 후대에까지 이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말이다. 사람은 부끄러움을 알아야 하니까.
아들은 영화를 다 보고 슬프다고 했다. 긴 호흡으로 영화를 보는 경험은 만족스럽다고도 했다. 다음 주엔 이 당시의 영화를 한 편 더 보려고 한다. <암살>이 좋을지, <밀정>이 좋을지, 아니면 중국의 상황인 <무명>이 좋을지는 고민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