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5-3. 브랜드네임이 시공간을 지배한다
우리 버벌브랜딩팀은 한 달에도 수 개의 브랜딩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프로젝트가 종료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그 결과물을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일례로 브랜드네임의 경우, 때로는 확정되었던 제품의 출시가 무산되어 버리기도 하고,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던 브랜드네임이 프로젝트 종료 이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슬쩍 변형을 거쳐 조금 다른 이름으로 출시되기도 하는 등, 우리가 열과 성을 다해 만든 브랜드네임들을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시장에서 만날 수 있지는 않다.
그래서인지, 작업에 참여했던 브랜드들이 그 모습 그대로 대중 앞에 선을 보이면 더욱더 반가운 기분이 든다. 식품이나 화장품 같은 경우에는 제품이 출시되면 피땀 흘려 탄생시킨 브랜드네임이 오래오래 사랑받기를 바라며 으레 하나씩 구매하곤 하는데, 그럴 수 없는 경우도 왕왕 있다. 예를 들면 지지난 회에 소개한 ‘한남 더 힐’과 같은 경우, 우리 버벌팀에서 만든 브랜드네임이 명실공히 ‘대한민국에서 제일 비싼 아파트’로 불리게 된 것은 분명 좋은 일인데, 마침내 탄생한 결과물을 직접 경험해볼 수 없는 것은 조금 아쉬운 일이다.
버벌리스트Verbalist로 일하다 보면 이처럼 출시 후 손쉽게 소비자의 입장이 되어 경험해 볼 수 있는 브랜드와 그러기 어려운 브랜드가 대강 나뉘는데, 개중에는 ‘언젠가는 경험해 볼 브랜드’도 있다. 오늘 소개할 브랜드도 ‘언젠가는 경험해 볼 브랜드’에 속하는데 –참고로 이것은 우리팀 전체가 아닌 RA의 개인적인 분류일 뿐이다- 정식으로 소개하기에 앞서 작은 힌트를 제시하자면,
이 브랜드는 항공서비스 브랜드이다.
RA 말고도 아마 많은 사람들에게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경험해 볼 항공서비스’인 바로 그것, ‘비즈니스석’의 브랜드네임을 소개하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겠다.
비행기 좌석도 ‘브랜딩’을 한다고?
버벌리스트Verbalist로서 자신 있게 말하건대, 세상에 브랜딩이 불가능한 영역은 없다. 브랜딩은 기본적으로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김춘수 시인도 말하지 않았던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에 우리는 이름을 붙이고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물론, 비행기 좌석도 예외는 아니다.
사실 비행기 좌석을 구분하는 ‘퍼스트석/비즈니스석/이코노미석’이라는 명칭 자체에 이미 브랜딩이 이루어져 있다. 퍼스트라는 명칭은 항공서비스 중에서도 으뜸의 일류 서비스임을 의미하고, 비즈니스는 해외를 자주 오가는 바쁜 사업가들을 위한 편안한 휴식과 업무가 가능한 공간을 연상시킨다. 이코노미는 그야말로 경제성을 강조한 이름인데, 사실 일등석/이등석/삼등석 중 가장 저렴하다곤 해도, 비행기 티켓 가격은 절대 만만치 않다. –후에 저가항공사들의 출범으로 정말 ‘경제적인 항공권’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항공사의 이코노미 좌석은 ‘일반석’이라는 명칭이 더 합당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소비자들의 관점에 공감했던 것일까. 항공서비스가 대중적으로 자리 잡아가면서 아시아나항공은 승객 절대다수가 이용하는 이코노미석을 경제성이 아닌 비행이라는 비일상적 이벤트가 주는 특별한 감성에 초점을 맞추어 재명명하기로 한다. 이 프로젝트 역시 우리 버벌브랜딩팀에서 진행했었는데, 최종 선택된 이름은 일상을 벗어난 여유와 즐거움, 자유로움을 의미하는 트래블석이었다.
내가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한 좌석이 금전적인 부분을 먼저 떠오르게 하는 이코노미석으로 불리는 것보다 두근두근 설렘이 가득한 트래블석이라고 불리는 것이 소비자들의 입장에서도 만족감이 훨씬 크지 않았을까? 아시아나항공이 이코노미석을 트래블석으로 새롭게 브랜딩한 것은 시대의 흐름 역시 금전과 같은 유형적인 것들에서 개인의 경험과 감정 같은 무형적인 것들에 더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한 지점에서 일어난 변화였다.
2010년, 우리 버벌브랜딩팀은 아시아나항공으로부터 ‘새로 도입될 IT설비를 갖춘 비즈니스석을 위한 브랜드네임을 지어달라’는 의뢰를 받게 되었다.
비행기 좌석에 갖춰진 IT설비들은 지금은 비즈니스석뿐만 아니라 일반석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지만 2010년만 해도 항공서비스의 품질과 품격을 대폭 상승시켜주는 혁신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새로 도입될 좌석은 180도 뒤로 젖혀져 장거리비행 동안 편히 누워 숙면과 휴식을 취할 수 있었고, 좌석들은 서로 반대방향으로 배치되어 옆 좌석의 승객이 무얼 하는지 전혀 보이지 않는 등 Privacy가 완벽하게 보장되었다.
비즈니스석에 처음 타보는 승객들은 ‘비즈니스석은 밥 먹을 때 포크와 나이프가 무려 세 개씩 나온다!’는 사실에 놀라곤 하는데, 비즈니스석의 가격에 걸맞게(?) 고급레스토랑 수준으로 제공되는 Food & Wine 서비스는 승객 개개인의 입맛과 취향, 알러지나 지병 여부 등을 고려하여 개인화Personalize 된 것이 특장점이다. 요즘은 어느 분야든 고객의 취향과 개성을 중요시하는 개인화서비스가 큰 인기를 얻고 있지만, 2010년만 해도 이러한 개인화서비스는 매우 특별한 고급서비스로 분류되었다.
당시 프로젝트에서는 이러한 비즈니스석만의 항공서비스를 ‘하늘을 나는 호텔링 서비스’로 정의하고 이에 맞추어 브랜드네임에 접근했다. 혁신적인 IT설비와 좌석의 설계에서부터 철저히 보장되는 Privacy, 고객 개개인에 맞춘 개인화서비스 등 비즈니스석만의 항공서비스를 총망라할 수 있는 키워드로 ‘SMART’가 도출되었고, 여기에 공간을 의미하는 ‘UM’을 합성하여 다음과 같은 브랜드네임이 최종 탄생하였다.
이것은 단순히 IT설비가 잘 갖추어진 물리적 실체를 설명하는 브랜드네임이 아니라 비행이 이루어지는 ‘시간’ 동안 비즈니스석이라는 ‘공간’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것이다. 항공서비스는 주어진 비행시간이 모두 종료되면 물건을 구입할 때와는 달리 내 손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꽃’을 ‘꽃’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내가 경험한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명명하느냐는 더욱 중요해진다. 이것은 경험에 대한 향후 소비자의 기억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비행이 모두 끝난 후에, 자신이 경험한 시간과 공간을 고객은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그것 참 스마트한 경험이었어!’
브랜드네임은 고객이 경험하게 되는 시간과 공간을 규정함으로써 시공간을 지배한다. 브랜드네임이 시공간을 ‘스마티움’이라고 정의했기 때문에 고객은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고, 또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시공간에 대한 나만의 경험과 나만의 해석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는 시대이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시공간을 정의하는 브랜드네임은 더욱 중요해진다.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작가가 부여한 제목이 있으면 관객도 그로부터 더욱 활발하게 심상을 떠올릴 수 있는 것처럼 개인의 경험도 주어진 브랜드네임과의 소통 속에서 더욱 활발하게 의미를 발견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스마티움의 탄생으로부터 십 년이 지나며 ‘SMART’라는 단어도 일종의 대중화(?)를 겪게 되었다. 첫 등장 무렵에는 혁신의 상징이었던 스마트폰은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씩 가지고 있는 기본아이템이 되었고, 새로운 기술에 으레 붙여지던 스마트라는 수식어는 ‘스마트요금제’처럼 똑똑한 소비자를 위한 알뜰함까지 뜻하게 되었다.
하지만, 전지구인의 필수아이템이 되었어도 스마트폰은 여전히 ‘스마트’하다. 단어의 용례가 좀 더 확장되었을 뿐, 혁신과 영리함은 퇴색되지 않은 것이다. 아시아나항공의 스마티움도 여전히 건재하다. 다만 요즘은 비즈니스석뿐만 아니라 이코노미석에도 ‘이코노미 스마티움’을 따로 마련하여 클래스 내에서 보다 업그레이드 된 항공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하늘길이 얼어붙은 지도 어언 2년이 다 되어간다. 백신접종완료율이 70%에 도달하며 단계적 일상회복을 논의하고 있는 지금, 해외여행에 대한 기대감도 더불어 높아지고 있다. 과연 언제쯤 이전처럼 해외여행이 가능해질까? 해외여행 자체가 불가능한 시국 때문인지, ‘언젠가는 경험해볼 브랜드’에 대한 열망은 점점 더 커져간다.
‘스마티움, 언젠간 타고 말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