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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일규 Jul 31. 2021

여름을 닮은 아름다운 먹먹함, 황인찬 <무화과 숲>

여름 감성 문학, 훼손하지 않고 거리를 두며, 그럼에도 하나가 되는 경험

 우리는 사계절 같은 해를 바라보지만 여름의 햇빛은 유독 아득하다. 이러한 존재감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감정들과 저질러 버린 일들을 더위 탓으로 돌릴 수 있게 하기 때문에 가끔은 고마운 마음도 든다.

 이미 여러 소설의 주인공들이 한 여름의 더위를 참지 못하고 사랑에 빠졌다. 이 계절의 휴가철과 같이 짧지만, 그 어떤 사랑보다 뜨겁다. 나에게 '여름'하면 떠오르는 문학 작품 몇 편이 있다. 그중에서 황인찬의 <무화과 숲>은 내가 사랑하는 여름의 먹먹함과 닮아있다.




 황인찬 시인의 <무화과 숲>은 2012년 발간된 황인찬 시인의 첫 시집 『구관조 씻기기』의 마지막에 수록된 작품이다. 문단에서 인정받는 동시에 대중의 호응을 이끌어 내는 일은 쉽지 않지만, 황인찬 시인은 첫 시집으로 이러한 성과를 거두어 냈다. 특히 대중들에게는 『구관조 씻기기』라는 시집보다 <무화과 숲>이라는 작품이, 더 자세하게는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라는 마지막 행이 인기를 끌었는데,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시인이 선사하는 아름다운 먹먹함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쌀을 씻다가

창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 <무화과 숲> 전문




 화자는 쌀을 씻는 일상적이고 매일 반복되는 행위를 하고 있다. 또한 매일 바라보는 창밖 풍경을 보면서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평범한 일상 속 늘 같아야 할 창밖 풍경을 마치 나타났다 사라진 환상을 본 것처럼 말한다.

 그는 이 숲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다. 바로 “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은 곳”이며, 그곳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꽃을 겉으로 피워내지 못하는 무화과가 열리는 '무화과 숲'이다. 즉,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을 이어가던 화자는 이루지 못했던 사랑과 사람을 떠올렸고, 여전히 그 사랑은 그에게 깊고 울창하게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는 이 사랑에 당당하고 떳떳하지 못하다. 이를 옛날 일이라고 단정 지으며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라며 마치 해야 할 일이 마땅히 정해져 있다는 듯이 본인을 타이르고, 잊으려 노력한다. 그러나 이렇듯 겉으로 피워내지 못한 사랑은 화자의 개인적인 자제력과 통제가 무너지는 꿈속 공간에서 영위된다.



 시인은 일상 행위와 언어, 차분한 어투를 통해 감정의 과잉 없이 담담히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시의 마지막 행에서 시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구절을 강력하게 작동시킨다. 마지막 행인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가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끈 이유는 이 시를 향유하는 모두에게 이 문장이 강력히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문장이 좋게 느껴지는 이유는 “혼난다”라는 어린 아이나 순수한 사람이 쓸 법한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순수한 사랑임에도 금지되고 제약되는 사회를 보여줌과 동시에,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잊지 못하고 잊으려 노력하지만 자제력과 통제가 무너지는 꿈속에서야 사랑을 이룰 수 있는 상황의 애틋함을 잘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황인찬 시인은 늘 시적 대상에 거리를 두고 훼손하지 않고 관찰하며 담담한 어투와 일상적인 언어들로 시를 풀어낸다. 이는 그의 시를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그의 시선에서 함께 대상을 거리를 두고 관찰하고, 담담한 분위기로 시를 읽을 수 있게끔 한다. 그렇게 『구관조 씻기기』를 읽었다. 아주 조심스럽고, 하지만 왠지 모르게 긴장되고 고조되는 마음으로.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시집의 끝을 달려오던 중 시집의 마지막 시, 마지막 행인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을 선사받았을 때의 감동과 쓸쓸함, 먹먹함은 여전히 잊히지 않는다. 늘 시적 대상에 거리를 두고 관찰하던 시인은 마지막 작품, 마지막 행에 와서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을 꾼다. 시인은 독자로 하여금 대상을 훼손하지 않고 거리를 둔 상태에서 단 4어절로 그 간극을 좁히는 경험을 선사한다. 앞서 제시한 다양한 이유 너머에 있는, 시집 전체를 아우르는 감상이다. 그리고 이 시집을 순행으로 읽었다면 모두가 그런 경험을 했을 거라 생각한다.


 시를 더욱 깊이 감상하기 위해서는 시집을 통째로 읽어보길 권한다. 현대시는 하나하나 분석하기보다는 마음으로 읽고 느껴야 한다. 그러므로 자신만의 또 다른 감상에 젖어도 좋다. 분명한 건 여름의 햇빛을 바라보는 시선을 닮은 시인의 연약한 관조에서 아름다운 먹먹함을 느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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