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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일규 Aug 05. 2021

문창과랑 연애하면 생기는 일

비추합니다.


비추합니다.

사적인 이야기다.
     
 몇 번의 연애를 경험했고 죄다 요란 맞게 실패했다. 사실 연애에 있어 성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기준에서 나는 지금껏 실패한 게 맞다. 한동안 나쁜 버릇도 생겼었고, 내 생각이지만 상대방 또한 좋은 기억이라고 여기진 않을 것 같아서. 그럼에도 타인과의 깊었던 관계는 여전히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다.


 나는 문창과를 나왔지만, 글을 쓰는 일은 나 자신도, 상대방도 힘들게 한다. 어쨌건 나야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으니 평생의 애증처럼 함께한다 쳐도, 그런 사람들이 낯설었던 상대방들에겐 참 곤혹스러웠을 수도 있겠다. 몇 년 전 연애를 떠올리며 이제야 생각한다. 내 애정과 미움 섞인 글들이 부담을 주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것을.
 
 그때 나누었던 대화들을 지금 다시 읽어보면 그야말로 세기의 사랑이 아닐 수 없다. 낯 뜨겁고 숨고 싶고 웃기다. 그럼에도 당시 힘들어하던 내가 딱하긴 하다. 지금은 너무 아무렇지도 않아서 그런 글을 쓰고 싶어도 쓸 수도 없다. 가끔씩은 그때 감정을 빌려오고 싶을 정도로 나는 건조해졌다. 그리고 그때도 그걸 알고 있었는지, 시간이 흘러 회고했을 때의 시점에서 글을 쓴 흔적도 있더라. 이런 흔적들을 볼 때마다 상대방에게 미안해진다. 얼마나 유난했을까.




너는 널 잃지 않고도 나를 많이 가졌구나. 잃어버린 나는 너에게 가있다.

그리고 넌 그것들이 필요하지 않을 수 있겠다.


 나는 자주 마음에 맺힌 것들을 쏟아내기 위해 메모장에 글을 썼다. 그리고 한 번은 상대방이 나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는 표현을 이렇게나 이상하게 했었다.(사실 내가 봤을 땐 여전히 공감이 가고 이상하진 않다. 하지만 남들에겐 모르겠다. 그리고 좀 더 긴데 줄인 것.)


 물론 나는 저런 말을 직접 할 만큼 감성에 잠식된 사람은 아니고, 사회성이 있는 사람이라(?) 입으로 직접 뱉진 않았다. 실질적으로 내뱉은 말들은 정수되지 못한 날 선 말들뿐이었다. 지금 다시 만난다면 이제는 정말 그러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내가 이렇게나 슬픈데 상대방은 나보다 상처받지 않을 거라는 이기적인 전제하에 상처가 되지 않을 수 없을 말들을 내뱉었다. 그 사람은 나를 많이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나로 인해 상처받지 않을 거라 생각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정말 싫었고 힘들었다. 

 저런 대화를 거치고도 몇 달 더 만나다 헤어졌고, 저런 말이 오간 이후의 연애는 즐겁지 않았다. 마음이 식어가는 걸 보는 게 무서워서 다음에 누군가를 만나면 우리는 얼마큼 좋아하게 될 거냐고 물어봐야지. 생각하기도 했다.


 이 시점에 들어서는 참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먼 곳에서 누군가 북극곰을 도살하고 있는 것 같애"라는 시구가 이해되기 시작했고, 많은 시를 읽었다. 작은 사물에도 감정이입됐다. 심지어는 어느 날 차를 많이 남겼는데, 먹지도 않을 건데 열심히 우러난 티백에 미안하기까지 하더라. 휴대폰 메모장의 글들은 점점 쌓여갔다. 그리고 화가 미안함으로 바뀔 때쯤, 이별을 결심했다.


미안해 내가 이렇게 밖에 안 되네.

너도 미안하지 네가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어서.


마지막까지 참으로 이기적이고 이상했더랬다.


오늘은 그때 읽으며 공감하고, 위로받고, 다짐도 했던 네 편의 시를 추천하며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읽다 보면 내가 왜 이 시들을 좋아했는지, 어떤 마음으로 읽었는지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극장을 나와 우리는 밥집으로 갔네

고개를 숙이고 메이는 목으로 밥을 넘겼네
밥집을 나와 우리는 걸었네
서점은 다 문을 닫았고 맥줏집은 사람들로 가득해서 들어갈 수 없었네


안녕, 이제 우리 헤어져
바람처럼 그렇게 없어지자
먼 곳에서 누군가가 북극곰을 도살하고 있는 것 같애


차비 있어?
차비는 없었지
이별 있어?
이별만 있었지


나는 그 후로 우리 가운데 하나를 다시 만나지 못했네
사랑했던 순간들의 영화와 밥은 기억나는데
그 얼굴은 봄 무우순이 잊어버린 눈(雪)처럼
기억나지 않았네


얼음의 벽 속으로 들어와 기억이 집을 짓기 전에 얼른 지워버렸지
뒷모습이 기억나면 얼른 눈 위로 떨어지던 빛처럼 잠을 청했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당신이 만년 동안 내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들여다보고 있었네
내가 만년 동안 당신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붙들고 있었네
먼 여행 도중에 죽을 수도 있을 거야
나와 당신은 어린 꽃을 단 눈먼 동백처럼 중얼거렸네


노점에 나와 있던 강아지들이 낑낑거리는 세월이었네
폐지를 팔던 노인이 리어카를 끌고 지하도를 건너가고 있는 세월이었네
왜 그때 헤어졌지, 라고 우리는 만년 동안 물었던 것 같네
아직 실감 나지 않는 이별이었으나
이별은 이미 만년 전이었어


그때마다 별을 생각했네
그때마다 아침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던
다리 밑에 사는 거지를 생각했네

수수께끼였어,

당신이라는 수수께끼, 그 살(肉) 밑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잊혀진 대륙들은
횟빛 산맥을 어린 안개처럼 안고 잠을 잤을까


허수경, <수수께끼> 전문



우리는 말없이 헤드라이트의 빛만을 보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불안과 슬픔을 모르는 척 했고
터널이 빠르게 지나갔다
 
끝없이
앞으로 뻗어 가는 빛
 
저수지에 도달하기까지
그 시간이 너무 길게만 느껴졌다
     
저수지에는 깊이가 없고 내면이 없고
저수지에 비치는 것은 저수지 앞에 서 있는 것들
     
저수지 내부의 무엇인가가 그 안으로부터 튀어 오르리라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우리가 어젯밤 함께 나눈 것은 뭐였지?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저수지의 수면이 생명을 얻은 무엇인가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저수지에는 깊이가 없고 내면이 없고
끝없이 앞으로만
돌아오지 않고
     
우리는 지나갔다
저수지에 도달하는 일은 없었고
     
저수지 내부의 무엇인가가 그 안으로부터 튀어오르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황인찬, <저수지의 어둠> 전문



말린 과일에서 향기가 난다 책상 아래에 말린 과일이 있다
책상 아래에서 향기가 난다
     
나는 말린 과일을 주워 든다 말린 과일은 살찐 과일보다 가볍군
말린 과일은 미래의 과일이다
     
말린 과일의 표면이 쪼글쪼글하다
     
말린 과일은 당도가 높고, 식재료나 간식으로 사용된다
나는 말린 과일로 차를 끓인다
     
말린 과일은 뜨거운 물속에서도 말린 과일로 남는다
실내에서 향기가 난다

황인찬, <건조과> 전문



무엇과 왜와 어떻게라는 말 대신 그저 그렇게 되었다라고 하자 그저 그렇게 지금 여기에 놓여 있다라고 하자 다만 호흡하고 있다라고 하자 다만 있다라고 하자 다만 멀리서 가깝게 있다라고 하자 물결을 따라 흐르는 소용돌이를 본다라고 하자 소용돌이치며 사라지는 문장이 있다라고 하자 전해지지 않는 말을 들었다라고 하자 끝없이 이어지는 호흡이 있다라고 하자 또 다른 호흡이 또 다른 호흡 속으로 뛰어들고 있다라고 하자 순간의 폭발이 있다라고 하자 다만 소리가 있다라고 하자 다만 호흡이 있다라고 하자
     
그렇다 그렇다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다
     
하나의 순간에 하나의 무늬를 새겨 넣는 아름다움이 있다라고 하자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보고 있다라고 하자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는다라고 하자 그렇다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다 그렇다 당신의 뼈로 만든 악기가 울고 있다라고 하자 이름 모를 노래가 흘러나온다라고 하자 두려움이라는 말을 삭제한다라고 하자 사라지는 물결을 타오르는 불꽃이라는 말로 대신한다라고 하자 삭제된 문장 위로 삭제된 또 다른 문장이 내려앉는다라고 하자 최초의 물결을 최초의 지느러미라고 하자

그렇다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다 그렇다
     
깊이에 대한 검은색을 두렵지 않은 남빛이라고 하자 남빛의 날빛의 문장을 당신의 손에 쥐어 주고 있다라고 하자 바람을 발음하는 발원이 있다라고 하자 마음이 아프다라고 하자 마음이 아프지 않다라고 하자 가슴이 뛴다라고 하자 가슴이 뛰지 않는다라고 하자 끝없이 물결치는 원형이 있다라고 하자 끝없이 게속되는 숨소리가 있다라고 하자 소용돌이치며 다가가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라고 하자 다시 보이지 않는 당신을 본다라고 하자

이제니, <나선의 감각 - 물의 호흡을 향해> 



여담으로 이 시기에 시를 해석하고 작문하는 능력이 눈에 띄게 상승했고,

이후 문학 관련 수업에서 A+을 휩쓸었다는 소문이 있다...


아리아나 그란데의 thank u, next 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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