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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상의모든지식 Aug 04. 2021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브랜드, 활명수의 탄생

[활명수 시리즈 #1]

"보이느냐? 보이느냐?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니니라~"

속이 더부룩하고 소화가 안 될 때 찾게 되는 부채표 활명수, 처음 만들어진지 자그마치 120여 년이 넘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브랜드다. 과연 활명수는 어떻게 만들어지게 된 것일까?

1890년대, 한양을 찾아왔던 한 외국인이 있었다. 바로 영국인 여행가, 이세벨라 비숍. 그녀는 조선을 둘러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조선 사람들은 보통 한 사람이 3~4인분을 먹어치우고 4명이 앉으면 과일 20~25개가 사라지는 것이 다반사였어” 당시 조선의 성인 남자가 먹은 밥의 양이 7홉 정도였는데, 1홉이 180ml, 7홉이면 1260ml나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급체하고 토하고 설사하는 등 토사곽란으로 목숨 잃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고통받는 민중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하던 이가 있었으니, 고종황제 당시, 궁중 선전관이던 민병호였다. 선전관은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비서관 정도 되는 직책이었는데, 그래서 궁중에서만 사용하던 생약 비방을 어깨너머로 배울 수 있었다. 또한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에 서양의 선교사들로부터 서양 의학을 배울 수 있었다.

1987년, 선전관직을 사임한 민병호는 아들 민강과 함께 죽어가는 민중을 살리기 위해 궁중 생약 비방과 서양 의학을 접목시켜 새로운 물약을 개발했다. 그 물약이 바로 활. 명. 수, ‘생명을 살리는 물’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25일, 민병호의 아들 민강은 한성부 서소문 차동,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순화동 5번지 위치에 동화약방을 열고 활명수를 팔기 시작했다. 

활명수는 사람들로부터 ‘만병통치약’으로 불리며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1910년대, 60ml 한 병에 50전 정도 했던 활명수는 당시 설렁탕 2그릇에 막걸리 2~3잔을 사 먹을 수 있을 정도의 비싼 가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날개 돋친 듯 팔리는 대박 상품이었다.

그래서 회생수, 소생수, 보명수, 활명회생수 등 활명수를 따라 만든 유사 제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910년 8월 15일, 동화약품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묘책으로 ‘부채표 활명수’의 상표등록을 하게 된다. 이것이 국내 최초의 상표등록이었다.

그렇게 부채표는 공식적인 활명수의 상징이 되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여담으로 1919년에는 ‘활명액’에 대한 상표등록을 하게 된다. ‘활명액’이라는 새로운 상품을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혹시나 유사상표가 만들어지는 것을 방어를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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