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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냐 Mar 21. 2024

봄날은 간다

....



그녀다.

평일 오후엔 늘 같은 친구와 함께다, 주말에는 아들이나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와 함께 오곤 한다.

대도시의 근교 아웃렛이 나의 일터다. 나의 매장은 신제품과 이월상품을 함께 파는 복합매장이다.

이곳은 아웃렛인 데다가 요즘의 고객들은 아는 척하는 것을 반기지 않는 편이다. 나는 나름의 매뉴얼을 가지고 가벼운 인사를 나누며 고객의 성향을 살핀다. 그들은 알지 못하겠지만 나는 늘 고객의 인상착의와 특징을 노트에 써 놓고 기억한다. 하지만 여러 번 들리는 고객들을 알아보고 먼저 인사를 건네던 날들은 지났다. 좋아하는 이도 없지 않았지만 다시 매장에 들르지 않는 쪽이 더 많았다.


그녀는 무료한 얼굴로 행거에 걸린 옷들을 훑어보곤 세일폭이 큰 옷들을 먼저 골라 피팅룸으로 가져오곤 했다. 그러곤 몇 개든 입어 본 옷들 중에 한 두 개만 쇼핑백에 담아 가곤 했다. 그녀가 오늘은 웬일인지 혼자서 들어와 매장을 둘러보고 있다.

나의 매장은 편집샵으로 영국기반의 유럽 디자이너 브랜드를 판매한다. 그녀는 스웨터 세 장과 슬랙스 두 벌을 피팅하겠다며 들고 왔다. 그녀의 사이즈는 상의 34, 하의는 xs이다. 스웨터는 빈티지한 영국브랜드로 컬러는 따뜻하고 디자인은 평범하다. 그녀의 취향에 맞는 것이다. 입고 온 착장들을 보아도 그녀는 좋은 원단에 알만한 고급 브랜드, 액세서리나 가방, 신발은 조금 튀는 색감과 디자인이지만 옷은 늘 심플하고 채도가 낮은 단정한 것이다. 짧은 시간 둘러본 것에 비해 그녀가 들고 온 옷들은 원단과 테일러링이 괜찮아 나도 즐겨 입는 브랜드다. 마른 편인 그녀는 무엇을 입어도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오늘 들고 온 슬랙스는 몸이 가는 그녀에겐 더 커 보인다. xxs을 권해 가져다주고 피팅룸 밖에서 기다렸다. 그녀에게 이 브랜드의 슬랙스는 사실 그다지 잘 어울리진 않는다. 그저 늘 헐렁한 디자인의 옷을 사가곤 했던 그녀의 취향에 맞췄다.

그녀가 옷을 갈아입는 피팅룸 앞에 나는 서서 그녀가 옷을 갈아입고 내 앞에 서길 기다린다. 마치 그녀의 남자친구라도 된 것 같은 기분으로.

나만큼이나 익숙해져서일까?  말 한마디 건네는 법 없던 그녀가 피팅룸에서 나와 나에게 묻는다.

“괜찮은 가요? “

하마터면 나는 진심으로 말할 뻔했다.

헐렁하기만 한 그 옷은 사실은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아요, 나라면 비비안웨스우드나 스텔라매카트니의 재킷이나 원피스를 입겠어요.

입으로는 좋은데요라고 말하고 있지만 내 머릿속에선 그녀의 가슴둘레와 팔길이, 허리의 곡선과 힙라인에 맞춰 똑 떨어지는 빅토리아 베컴의 원피스를 권하고 있다.

한 번이라도 저 무겁고 두루뭉술한 스웨터와 다리가 세 개쯤 들어갈듯한 넓은 통의 바지를 벗기고 몸의 모양대로 떨어지는 실크셔츠를 입히고 싶다. 단추는 세 개쯤 풀고 짧은 스커트나 바짓 통이 좁은 시가렛팬츠를, 십 센티쯤 되는 하이힐을 신으면 구부정해 보이는 등이 펴질 텐데. 저 여자는 어쩌면 한 번도 그런 옷을 입어 본 적이 없을 것 같다.


평일 낮의 교외 아웃렛, 늘 치과 대기실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무료한 시간을 견디곤 했다.  몸에 붙는 옷을 입은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손바닥에 땀이 배었다. 어쩌면 그녀는 혼자 운전을 하고 이곳에 왔고 오늘은 혼자 먼 곳으로 여행을 온 기분이 되어 조금 흥분했을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여느 때와는 다르게 나에게 입고 나온 옷들이 어떤지 다시 묻고 피팅 중인 옷을 입은 채로 매장을 가로질러 돌며 신발과 모자를 신어보곤 뒤에 선 나를 돌아보며 웃기까지 했다.

저렇게 웃는 사람이었구나, 조금 쌀쌀맞아 보이던 그녀였는데

넓은 매장 안엔 다른 손님도 없고 평일엔 아르바이트생도 오지 않아서 “우리”는 신맛의 커피를 좋아하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만큼 가까워졌다.

오늘은 웬일로 입어 본 스웨터 세 벌과 두 개의 치노팬츠, 235밀리 운동화 한 켤레, 겨자색 비니 하나를 모두 계산하고 그녀는 매장을 나갔다.

나는 다른 손님이 들어올 때까지 계산대에 허리를 기댄 채로 문 쪽을 바라보았다.


여기 커피 좋아하시겠네요

손님이 빈 손으로 매장을 빙글 돌아 나간 후 그녀가 아래층의 커피 전문점의 커피를 들고 다시 매장으로 들어왔다.

아 고맙습니다  

순간 건네받는 내 손과 그녀의 손이 박자를 놓치며 커피가 반쯤 쏟아졌다.

급히 티슈를 여러 장 뽑아 커피를 치워 봤지만 역부족이라 안쪽에 들어가 대걸레를 들고 나왔다.


그런데 그녀가 없다.

간다는 말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쏟아지고 반쯤 남은 커피를 손에 들고 계산대로 돌아들어 왔다.

아 이 노트

나의 고객관리노트가 펼쳐 있다.

그리고 이렇게 적혀 있다.


아들 둘, 남편

귀신같이 세일하는 것만 골라삼

잘 입으면 봐 줄만은 할 듯


봤겠지......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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