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sco_Machu Picchu_Peru_2005
아에로멕시코(AeroMexico)... 아~ 참 애로 많았던 멕시코 항공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최근 인천공항까지 직항을 개설해서 중남미로의 거리를 가깝게 만든 항공사지만 내 감정은 여전히 곱지 않다.
2005년 6월 21일
페루 리마로 이동하기 위해 멕시코시티 공항에서 수녀님들과 아쉬운 작별을 한 후 체크인 카운터로 갔다.
여권과 아에로멕시코 예약표를 내밀고 기다리고 있는데, 젊은 여직원이 사무적인 목소리로 비자를 내놓으란다.
당황하지 않고... 웃으며, 우린 페루 가는데 비자가 필요하지 않다고 했지만 내 말은 안 들린다는 듯이 비자를 달란 말만 반복했다.
나는 계속 우린 관광목적이고 비자 없이 갈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자기 모니터를 가리키며 '얘가 너희는 비자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며 굳은 표정으로 버틴다.
아프리카, 멕시코를 거치는 사이 한국-페루 간의 무비자 협정이 파기되기라도 했나? 모니터가 우리가 일하러 가는걸 아나?
모니터를 보자 해도 밀쳐내고 사람들이 기다리니 물러서라 하며 비자나 받아오라고 사납게 군다.
당황한 나는 급히 공중전화를 찾았고 어딘가에 써놓았던 대사관 번호를 뒤적이며 멕시코 동전을 환전했다.(현지 돈을 공항에 올 때 찰코에 다 주고 왔다. ㅠㅠ)
5시 비행 편이었고 실랑이를 하다가 이미 4시가 넘은 시간, 다행히 대사관 직원이 전화를 받았다.
사정을 설명하니 우리는 비자가 필요 없고 뭔가 착각이 있는 것 같다고 한다.
본인이 아에로멕시코 본사로 연락을 해주겠다고 하며 기다려보란다.
멕시코시티에 사는, 카메라 감독의 친구분에게도 연락해서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곤... 애타는 마음으로 카운터 앞쪽에 서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 쌀쌀한 직원을 째려보며...
5시는 다가오고 머릿속은 점점 하얗게 변해간다.
리마 공항에서 우리를 기다릴 골롬반회 신부님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다.
지금처럼 로밍이 되는 휴대폰이 있던 시절이 아닌 데다가 계속 메일로 연락을 해왔기 때문에 사정을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거의 포기하고 5시가 다 되어가는 시계를 바라보던 순간, 갑자기 카운터가 분주해지고 건장한 직원 두 명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마침 친구분이 도착하고 그들과 대화를 하더니 설명도 없이 다 함께 우리 장비 가방을 나눠 들고뛴다.
헐레벌떡 그들의 뒤를 따라 뛰었다. 출국 카드도 안 쓰고 이미그레이션을 그냥 통과했고 짐 검사도 없이 옆으로 그냥 지나쳐 뛰었다.
이런 상황에선 항상 그렇듯, 가야 할 게이트는 공항의 가장 끝에 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이러다가 죽는 거구나란 생각이 들 때쯤 게이트에 도착했다.
직원이 가지고 있던 보딩패스를 넘겨받고 짐을 서너 개씩 받아 들고 엄청 친절한 승무원들의 안내를 받아 비행기로 들어갔다.
헤어지기 직전 친구분의 한마디를 챙겨 들으며... "얘들이 처음에 북한으로 입력한 거 같아"
비행기 안, 쿵쾅대는 심장이 좀 가라앉은 후엔 그 카운터 직원에게 증오에 가까운 분노가 치밀었다.
페루에 도착하면 항공사 홈페이지에 어마어마한 항의와 책임자 문책을 요구하리라 맘먹은 흔적이 취재수첩에 남아있다. (페루에선 그럴 시간도 없었고, 시간은 감정을 치유한다. ㅎ)
한 번만 더 확인해주지... 국가코드를 찍어야 하는 거 아닌가... 출발할 때 미안하단 말 한마디 안 하고... 동양인 무시하는 거야... 멕시코가 90년대까지 사회주의 국가였어서 북한이 더 익숙한 거야... 북한은 왜 페루랑 무비자 협정을 안 한 거야... 고마운 대사관 직원 이름이라도 물어볼걸... 못 탔으면 어휴 끔찍해... 그래도 참 다행이다. 하느님은 역시 존재해...
온갖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머리에 떠다니고 감정이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쯤 리마 공항에 도착했다.
초면인 강신부님에게 막 억울했던 사연을 늘어놓고 밤길을 달려 리마 골롬반회에 가서 잠만 자고 다음 날 일찍 쿠스코행 비행기에 올랐다.
너무 와보고 싶었던 곳. 쿠스코(Cusco)
처음 본 코스코는 그간 세상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었던 묘하고 신비로운 곳이었다.
3,200m의 고지에 형성된 옛 잉카의 수도.
그 오랜 풍상과 숨결이 거리 곳곳에 살아 숨 쉬고 많은 관광객들의 오고 감에도 도도하게 자신의 분위기로 모든 걸 품는 곳.
서구의 침략에 멸망한 문명이지만 문화와 전통은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았다.
잉카문명을 멸망시키며 이곳을 정복했으나 이들의 터전인 안데스 산맥 해발 3,000m 이상에서 살아낼 수 없었던 스페인의 침략자들은 태평양 연안 사막지대로 내려가 도시를 만들어 살았다고 한다.
그곳이 지금 페루의 수도인 리마(Lima)고 다행히 원주민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방식대로 고산지에서 삶을 이어왔다.
정복자가 강요한 종교인 그리스도교만 받아들인 채...
그들이 믿어오던 태양신을 하느님으로 대체하고 종교의 형식보다는 자연에 대한 경외와 공동체의 삶을 중요시하는 믿음 자체를 우선하며...
그리고 이곳은 유럽의 오스트리아 같은 나라가 그렇듯, 아름다운 풍경과 고산지의 강렬한 빛, 풍부한 점토 등의 영향으로 미술과 도예가 발달하고 많은 예술교육기관이 있으며 유명한 예술가들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일정을 이 시기로 맞춰온 이유는 브라질의 리우 카니발, 볼리비아의 오루로 카니발과 함께 남미의 3대 축제 중 하나인 인티라이미(Inti Raymi)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본 행사 일주일 전부터 다양한 축제가 열리고 있었고 쿠스코에 도착한 날, 수많은 인파와 흥겨운 분위기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관광객 모드로 함께 즐기고 싶었으나 이 축제는 작품의 한 부분만을 차지하는 것이기에 본 행사가 열리기 전에 부지런히 이곳의 삶과 문화를 담기 위해 일정을 소화했다.
쿠스코 인근 조용한 시골 마을 친체로(Chinchero)를 찾았다.
우리의 가이드를 맡아준 난시(Nancy)의 집이 있는 곳이기도 하고 잉카인들인 케추아족의 삶을 있는 그대로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화면에 다 담아낼 수 없음이 안타까운 아름다운 빛과 땅, 집, 산이 구분되지 않고 원래 하나인 듯한 마을의 풍경에 한참을 넋 놓고 있었다.
성당 내부의 오래된 벽화와 케추아어 성가 등을 촬영한 후, 난시 집에 초대받아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그리고 이들의 삶과 신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담았다.
이들의 순박함과 진심으로 환대해주는 마음이 깊이 느껴졌고 다시 오리라는 기약 없는 약속을 하고 쿠스코로 돌아왔다.
다음 날 새벽, 우리끼리 마추픽추행 기차에 올랐다.
쿠스코를 설명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곳, 스케치만 하는 일정이어서 굳이 가이드가 필요하진 않았으나 낯선 곳을 카메라 감독과 둘이 이동해야 하는 불안함은 없지 않았다.
본당 신자들을 돌봐야 하는 신부님의 시간을 너무 뺏고 있기도 해서 쿨한 척 걱정 마시라고 하고 다녀오기로 했다.
동트는 쿠스코, 만년설과 계곡 등 기차 타고 가는 길의 장엄한 풍경들에 시선을 빼앗긴 채 몇 시간을 달려 마추픽추 아래 마을 아구아스 깔리엔테스(Aguas Calientes)에 도착했다.
역시는 역시. 너무 신비로웠고 구석구석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잉카인들과 그들의 삶과 문화가 너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현장에서 영어 가이드를 한 명 섭외해서 설명을 들으며 한 바퀴 돌았다.
다 알아듣진 못하면서 연신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녹음은 따로 해두고…)
친절하게도 좀 못 알아듣는 것 같으면 중언부언 설명을 이어가서 빨리 이동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마추픽추 곳곳을 촬영하고 가이드를 보내고 난 후, 전경을 찍기 위해 높은 뷰포인트에 올라서 경치를 감상하며 쉬고 있을 무렵, 저 밑 버스 정류장 쪽에서 반가운 한국말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일군의 한국 관광객들을 인도하는 가이드의 외침이었다.
새벽부터 우리끼리가 아니면 한국말을 꺼낼 수 없었던 반벙어리의 답답함이 있었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여기에 올라오시면 인사를 나눠야겠다고 생각하며 내려보고 있었다.
- 가이드 : 이리 올라오세요~ 저위에서 먼저 사진 찍어야 해요~
- 관광객들 : 아이고, 아이고, 다리 아파 못 올라가. 그냥 저리로 내려가요.
그렇게 멀리 한국에서 온 패키지 여행객들은 마추픽추 내부로 사라지셨다.
이때만 해도 남미 패키지여행은 15일짜리 값 비싼 상품밖에 없었고 그 시간과 비용을 내고 여행사 상품으로 오시는 분들은 시간과 경제적인 여유를 가진 노인 분들이었다.
그분들이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허탈하게 바위에 걸터앉아서 생각했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건강이 허락할 때 해보고 가보고 느껴야겠다고...
여유가 생긴 후에 하려고 버킷에 리스트를 가득 채워봐야 나중엔 제대로 경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뭐 지금도 여전히 닥친 일에 매몰되어 살고 있지만 ㅠ)
쿠스코로 돌아온 다음 날 인티라이미 본 행사가 열렸다.
2005년 6월 24일.
우리에겐 하지(夏至) 때지만 남반구에 위치한 페루는 이때가 동지(冬至)다.
해가 가장 짧은 때여서 산지에서 감자와 옥수수 농사로 연명을 하던 이들에게 부족해진 빛은 생존에 대한 두려움으로 느껴졌으리라.
그래서 일 년에 한 번 모두 모여 그들의 유일신인 태양에게 자기들을 버리고 가지 말고 돌아와 달라고 기원을 하는 제사를 올리는 것이다.
본 행사 장소인 삭사이와망(Sacsayhuaman)으로 가기 전, 일종의 오프닝 예식을 쿠스코의 산토 도밍고 성당에서 한다.
안데스 산맥 동서남북 네 지역에서 부족들이 모여들고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 성당의 난간에 나타난 잉카의 왕은 기도(?)로 본 행사의 시작을 알린다.
태양의 아버지
기쁜 마음으로 당신께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를 인도해주시고 빛을 비춰주소서
태양의 아버지, 태양의 아버지
당신의 빛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당신의 빛은 우리를 인도해주십니다
잉카의 왕이 바치는 케츄아어 기도를 현장에서 난시와 신부님의 2단 통역을 통해 받아 적어놓은 기록이다.
동지를 지나면 해가 다시 길어지는 게 당연한데 굳이 이렇게 사정사정해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요즘의 심각한 기후 변화를 생각하면 당연할 것 같은 자연의 순환에도 감사하고 정성 들여 자연의 신비를 지켜나가려 했던 옛 선조들이 훨씬 현명한 사람들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짧은 세리머니 후, 예식에 참여한 이들과 관광객들 모두 쿠스코 위쪽 주 행사장인 삭사이와망으로 이동했다.
쿠스코와 마추픽추에서 볼 수 있는, 정교하게 조립된 돌들의 원형을 볼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주최 측과 쿠스코대교구에 미리 양해를 구해놓아서 축제 장면을 우리만 근접 촬영할 수 있었고 이들에겐 매년 보는 축제 장면보다 동양에서 온 두 사람이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다니는 게 더 큰 구경거리였던 것 같다.
축제 후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를 인사를...
다양한 춤과 음악, 상징적인 퍼포먼스가 연신 어우러졌고 실제로 양을 죽여 바치는 예식도 있었다.
쿠스코의 모든 사람들이 준비하고 참여한 듯한 대규모 축제는 오랜 시간 장엄하게 열렸고 흥미진진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나흘간의 짧은 방문이 너무 아쉬울 만큼 쿠스코는 무척 매력적이었고 나중에 여행으로 다시 오리라 마음먹은 곳들 중 가장 먼저 찾은 곳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