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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종훈 Apr 13. 2024

나는 말하는 디자이너가 되기로 했다

정기용 선생님 이야기

다큐멘터리 <말하는 건축가> 포스터, 2011年



정기용(鄭奇鎔, 1945년 8월 4일 ~ 2011년 3월 11일)은 대한민국의 건축가이다. 무주 프로젝트, 기적의 도서관, 노무현 전 대통령 봉하마을 사저 등을 설계했다. 출처 : 위키백과




이 분, 정기용 건축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0년전, 고등학교 때 경제 선생님이 최근에 인상 깊게 봤다며 추천해준 영화 '말하는 건축가'를 보게 되었을 때였다. 당시 나는 막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장래희망으로 갖고 싶어했고, 건축은 내가 희망했던 제품 디자인과 결이 비슷한 직군이라 관심을 가지고 네이버에서 구입하여 시청했던 기억이 있다. 

사실, 부끄럽지만 그때는 정기용 선생님이 영화 중간에 딱 한마디 언급한 '이모집 바싹 불고기'란 단어 만이 기억에 남아 있다.. 심지어 불고기는 한 컷도 등장하지 않았었고 정기용 선생님의 걸걸하고 바싹 마른 목소리로 군침을 다시며 말했던 그 단어가 저절로 바삭하고 향긋한 불고기의 모습을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그 이외에는, 그가 남긴 건축물의 모습이라던지는 기억에 남지 않고 그저 따듯한 봄 햇살에 녹아드는 바람 내음이 느껴지는 장면의 어렴풋한 기억 뿐이다. 



다시 10년이 지나, 문득 인스타그램에서 릴스를 넘기는데 말하는 건축가의 한 장면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자택에서 유난히 성스럽게 비치는 일직선의 노을 햇살을 받으며 한 마디 읊는 그의 모습은, 짧은 장면이었으나 지난 잊고 있었던 10년 전의 기억을 들추기 충분했다. 이제는 불고기가 아니라 이 영화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지, 하고 다시 영화를 보러 여러 포털사이트를 찾아 보았으나 정식으로 이 영화를 넷상에서 돈주고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포기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메가박스 아트나인에서 이 말하는 건축가를 재개봉한다고 하는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정말 우연히, 내 생일날에 GV를 진행한다는 소식까지. 


말하는 건축가 GV 현장 ㅣ 정재은 감독(좌) 정다영 학예연구사(우)


부리나케 예매를 마치고, 들뜬 마음으로 영화를 보러 갔다. 두 번째 보는거지만 너무 오래되어 사실 처음 관람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단 하나의 생각뿐이 나질 않았다. 디자인이라는 업을 택하고 어떻게 이 길을 헤쳐나갈지, 이 길에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앞이 캄캄한채로 지난 몇년동안 방황했던 내게 나는 이미 내가 가야할 길과 그 길의 끝의 무엇이 있을지 내가 지난 수년간 고민했던 답은 사실, 이미 10년전 이 길을 가기로 마음먹었던, 경제 선생님이 영화를 추천해줬던 그 시작점에 있었음을 말이다.


건축물 그 자체를 보기 전에 사람을 바라보고, 그것이 서 있을 자리에 주위 자연과 생명들과의 조화를 우선하여 바라보고, 건물의 외적 가치가 아닌 '삶'에 맞추어 건축을 행하였던 정기용 선생님의 의지. 

내가 느꼈던 그의 건축의 특징은 무주 등나무 운동장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연과 정말 '자연스럽게' 눈에 띄지 않고 그저 그 자리에 '툭'어울러지며 세련되지 않아도 사람들 곁에 자연스레 다가서주는 것.  


사실, 지금도 그가 설계한 어떤 '건축물 모습'이 기억에 남지는 않는다. 그가 행한 기적의 도서관, 무주 안성면 사무소, 앞서 얘기한 등나무 운동장도 그렇고.. 선생님이 '자하 하디드의 뱀'이라 불렀던, 처음 마주쳤을 때 그 기상천외한 '외형'놀랄 밖에 없던 동대문디자인플라자와 대비되는 것이다.

다만, 그의 건축에서는 단 한 가지 밖에 기억에 남지 않는다. 그것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무주 안성면 사무소에 지었던 동네 목욕탕 입구에서 할머니의 옆에 덤덤하게 앉아 만족스러운지 뭔지 모를 표정으로 햇살을 받으며 앉아 있던 그의 모습만이 떠오를 뿐이다. 그저 그것을 이용하며 즐거운 미소를 짓는 사람의 표정만이 기억에 남는 것이다.

기적의 도서관 시리즈들도 마찬가지이다. 도서관의 형태적 특징보다도 그것을 이용하며 즐겁게 뛰어 노는 아이들의 모습만이 기억에 남는다. 정기용이라는 건축가의 건축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그것이다. '건축 그 자체'가 아닌, 그것으로써 사람들의 삶을 담아내어 이롭게 하는 것.


디자인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특히나 내가 업으로 삼은 산업-제품 디자인의 영역에서도, 물건이 사람보다 더 범람하는 이 시대에 제품 그 자체가 아닌 그것을 이용하며 즐거운 표정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을 목표로, 그저 사람들의 곁에서 그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제품 디자인의 본질이자 숙명인 것이다.


나는 이제서야 내가 어디로 가야할지, 그 길에 끝에 무엇이 있는지, 이 영화를 통해, 정기용 선생님의 삶을 통해 확인한 것만 같았다.


올해 초에 재미로 보았던 여러 영문자들이 뒤 섞인 표에서 가장 먼저 마주친 3개의 단어가 바로 올해 얻을 것들이라고 했는데, 나는 그 중에서 Clarity, Forgiveness, Relaxation 이었는데, 그 중에서 나는 올해 생일 선물로 Clarity를 얻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할지 나는 알고 있으니, 지금의 내가 해야 할 것은 그저 당당하게 첫걸음을 떼는 일 뿐이다.


<말하는 건축가, 2011>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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