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장의 정의
비가 오면 안 된다. 빗방울을 맞으며 술을 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매캐한 먼지와 모래를 조심해야 한다. 지나다니는 행인의 시선도 있다. 가끔은 담배 연기에 훈연당하기도 한다. 의자는 불편하고 공간은 협소하다. 화장실도 멀고 바닥은 아스팔트면 다행인 수준이다. 안타깝지만 위생과 거리가 멀 수도 있고, 더 안타깝지만 맛이 없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때때로 지붕을 걷어내고 불편함 속으로 몸을 내던지고 싶어 한다.
야장이란 단어가 정확히 무슨 뜻이고 어디서 유래했는지 생각해 본 적 없다. 하지만 그 분위기만큼은 알고 있다. 야장은 이제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다. 빛바랜 노포에서 늦은 저녁에 간이 테이블을 펼친다. 대게 새파란색, 혹은 새빨간색이다. 플라스틱 의자에 불편하게 앉아서 가로등 불빛을 광원 삼아 술과 음식을 먹는다.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야장의 정의이자, 야장이 내포하고 있는 분위기다.
야장은 새로 생겨난 용어도, 트렌드도, 업태도 아니다. 꽤 익숙하고 정겨운 풍경이었다. 또한 복작복작의 느낌은 있었지만 절대 와글와글은 아니었다. 소소하게 모여 자그마한 소란을 일으키는 정도였다. 하지만 어느샌가 야장은 외식 트렌드 선봉에 섰다. 공간의 특수성 때문인지 우후죽순으로 생기지는 못했지만 군데군데 생겨난 신생 야장들은 늘 뜨거워고 붐볐다.
동네에 야장 하나쯤은
절대 특별하고 대단한 풍경이 아니었다. 동네 호프집이나 주점에서 해가 지고 난 후, 간이 테이블을 도로와 길가에 펼치는 것으로 야장은 막을 올린다. 적당히 괜찮은 날씨에 근처를 쏘다니는 행인들을 유혹하는 수단이자 한정적인 객장을 일시적으로 넓힐 수 있는 도구였다. 인위적으로 생겨난 풍경이 아닌 지극히 자연스러운 이유에서 야장은 생겨났다고 생각한다.
대단한 맛인가? 딱히 그렇지도 않다. 잘 튀겨진 닭, 혹은 안주와 시원한 술이면 됐다. 조금은 불편했다. 저항감 있게 드르륵 끌리는 플라스틱 의자와 군데군데 그림자가 드리운 단색의 간이테이블은 야장의 상징이었다. 대단하지 않았지만 그 대단하지 않음이 참 좋다. 차와 행인들의 소리, 차게 스치는 공기, 공중으로 떠다니는 말소리와 적당한 소란. 뭉개지는 빛.
포장마차와는 확연히 다르다. 모든 것이 간이로 이뤄지는 포장마차와는 그 결이 다르다. 엄연히 정식으로 존재하는 주방에서 다듬어진 요리가 나와야 한다. 자리와 환경이 적당히 불편한 것이지 모든 경험이 불편한 것과는 다르다. 어엿한 실내 공간이 있는 식당에서 우리를 포함한 몇 테이블만 삐죽하고 튀어나와 있는 그 감성, 정돈된 곳에서 작은 일탈 같은 그 느낌.
하지만 동네에 하나쯤 자연스레 존재하던 야장은 자취를 감춘 모양이다. 변해가는 외식업 속에서 동네 호프집과 주점이 설 자리를 잃었다. 그마저도 각종 규제와 제도로 인해 길과 도로에 간이테이블을 펼치는 것도 어려워졌다. 동네 호프집이야 알면서도 모르는 척 테이블을 펼쳤겠지만 프랜차이즈로 변한 치킨집들은 굳이 그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어졌다. 결국 여전히 우린 야장을 좋아하지만 야장 자체가 너무 희소해지기 시작했다.
야외의 희소성
한동안 바깥에서 무얼 하는 것이 참 어려웠다. 코로나와 미세먼지, 이 두 가지는 우리가 야외에서 무언갈 할 수 없게 만든 가장 큰 이유였다. 우리는 더욱더 안으로 들어갔고 입 위에는 마스크를 얹었다. 깨끗하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지붕이 없는 곳에서 먹고 마실 수 있는 기회가 드물어졌다.
또한 급격하게 달라진 풍경도 한몫을 한다고 생각한다. 풀과 나무와 멀어지고 콘크리트 벽 사이로 우리의 몸을 집어넣으면서 산과 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다녔다. 한창 정점이었던 캠핑과 지금도 많은 이들이 찾는 한강이 대표적인 예시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캠핑은 소수의 취미였고, 한강은 고기를 구워 먹는 가족 단위 방문객이 주를 이뤘다.
비록 자연이 아닌 빌딩숲 사이에서 이뤄지는 야장이지만 지붕이 없는 곳에서 음식을 먹는다는 것만큼은 똑같다. 풀과 나무 사이로 불편을 감수하고 들어가는 캠핑과 한강보다는 조금 덜 불편하지만 바깥공기와 음식을 함께 먹을 수 있다. 이런 수요가 생겨나는 와중에 아이러니하게도 동네의 야장은 하나 둘, 저물어 갔으니 이 시장을 공략하는 새로운 야장들이 도심에 생겨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을지로와 노가리 골목
이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골목은, 식당은 만선호프다. 2010년대 말, 노가리 골목의 옥외영업이 정식으로 허용되면서 일대의 거리는 간이 테이블로 빼곡하게 채워졌다. 골목의 원조이자 살아있는 역사인 OB맥주와의 분쟁은 너무나도 유명하지만 안타깝게 지금의 을지로 인쇄소 거리를 점령한 것은 만선호프이며, 모두의 인식에 을지로 = 야장 = 만선호프로 남아버렸다.
스무 살이 되어 당시 핫해지고 있다는 을지로 뒷골목에 처음 들어섰을 때는 참 놀라웠다. 맞은편에는 인쇄소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고 도로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이 테이블이 깔려 있었다. 구도심 건물 사이에 포근하게 자리하면서 바쁘고, 또 정신없었다. 소리를 질러야 대화가 되었고 불친절과 불편함은 그 한계점에 걸쳐있었지만 그곳에 찾아간 이상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만선호프의 성공 이후 야장은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옥외영업은 여전히 힘들었기에 건물 옥상을 활용한 루프탑이 각광을 받았다. 서울 하늘 아래에서 야장이라는 타이틀을 달면 제아무리 테이블이 적고 좁을지라도 웨이팅을 했다. 이 시점부터 야장은 자연스러움과 사뭇 멀어졌다. 야장을 위해 일부러 공간을 조성하고 좁은 공간에 극도로 많은 사람이 앉아야만 했다. 야장은 다시 부흥했지만 아예 다른 개념으로 존재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러움의 부자연스러움
본래의 야장은 불편하긴 했지만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테이블이 깔리고 손님들이 자리에 앉아 맥주를 걸치는 모습은 당연해 보였다. 야장은 본디 불편함을 내재하고 있기에 그것에 대한 호불호는 당연했다. 하지만 요즘은 이 부자연스러움에 대한 호불호도 확실하다. 야장이지만 꾸며낸 듯한 자연스러움. 너무 과밀하여 야장보다는 시장처럼 느껴지는 혼잡함. 불편함에도 가격은 비싸고, 음식 맛이 그저 그런 아쉬움.
정말 오랜만에 동네 호프집에 갔다. 야장의 정석과도 같은 곳에서 가을바람을 솔솔 느꼈다. 물반죽으로 얇게 튀겨낸 치킨이 꽤 먹을만했다. 간이 테이블은 고작 3개였고 거니는 행인들이 잘 보였다. 이따금 바람에 담배냄새가 묻어났으나 "아 이게 야장이었지" 하고 용납될 만큼 옛 모습을 잘 갖추고 있었다.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오랜만에 간 호프집이 옥외영업을 정식으로 허가받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안다. 자연스럽고 정겹다고 해서 제도권 밖에 있는 것을 용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장사가 그리 잘되는지는 모르겠다. 그것 역시 안다. 살아남지 못하면 밀려나는 것은 자연스럽다는 것을. 야장은 새롭게 정의되고 있으며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바뀌고 있다. 지극히 자연스럽지만 부자연스럽다. 우리가 그토록 야장을 찾아 헤매던 이유에서 한 발자국씩 멀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인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