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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란 Jul 10. 2021

<버닝> : 이 세상의 모든 헛간들을 애도하며

무의미한 것들의 무존재성

결국 헛간은 태워졌다. 마치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다. 그저 깨끗이 사라졌을 뿐. 그리고 소설의 여자 주인공 또한 사라지고 만다. 대체 그녀는 왜 사라진 것이며 헛간은 왜 태워질 수밖에 없었는가. 사라진 그녀와 태워진 헛간은 무얼 의미하는가.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은 하루키의 단편 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글의 앞부분은 소설을 중심으로, 뒷부분은 영화를 중심으로 합니다.)


소설 속 여자 주인공의 취미는 팬터마임이다. 귤을 까서 입속에 넣고 꿀꺽 삼키는 연기, 팬터마임은, 실제로 귤을 까먹는 행위와 동일한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귤’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지 않는 이야기들을 곧잘 늘어놓는다. 그녀는 번듯한 직장을 가지지도 않았다.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작고 불규칙한 수입과 가끔 만나는 남자들과의 데이트로 삶을 연명하곤 한다. 그렇다. 그녀의 삶에는, 그녀의 시간들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 헛간 또한 그러하다. 물건을 마구 쌓아두는 곳. 크게 존재감이 없어, ‘의미’가 없어, 사라진다 해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다. 흔적 하나 없이 태워지고 나면,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만 같아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다.


여자 주인공의 남자 친구는, 이러한 헛간을 두 달에 한번, 덩그러니 놓여있는 남의 헛간을, 그 헛간을, 태운다. 없애버린다. “휘발유를 뿌리고, 불이 붙은 성냥을 던지는 겁니다. 가만 놔두고, 그게 끝이죠. 다 타는 데 십오 분도 걸리지 않습니다.” 그는 방화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헛간을 태우고 싶을 뿐이다. 다시 말해, 그저 불을 지르기 위한 방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헛간을 없애기 위해 방화라는 수단을 택한 것일 뿐이다. 왜 헛간을 그렇게도 없애고 싶냐 는 남자 주인공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세상에는 헛간이 얼마든지 있고, 그것들은 모두 내가 태워주기만 기다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십오 분이면 깨끗하게 태워버릴 수 있지요. 마치 처음부터 그런 건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아무도 슬퍼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라질 뿐이죠. 깨끗이요. 저는 판단 같은 거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태워지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저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그는 헛간이 태워지길 기다리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태워지고 나면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그는 헛간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태워버려야 한다고 스스로 판단한 것이다.


그렇다. 여자 주인공의 남자 친구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헛간은 태워져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특별한 의미를 가지지 못하기에 존재의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는 별 죄책감 없이, 무덤덤하게 두 달에 한번 헛간을 태운다. 마치 할 일을 하는 것 마냥.


그가 왜 굳이 자신에게 헛간 이야기를 털어놓는지 궁금했던 남자 주인공은 그에게 이유를 묻는다.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은 소설을 쓰는 사람이니 어떤 사물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 전에 그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특이한 행위이자 범법 행위이기도 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이야기가 판단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길 원한 것이다. 본인은 헛간을 판단하고 소멸시키기까지 하면서. 참 괘씸하다.) 그의 말대로 남자 주인공은 그런 사람이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인 것이다. 특별한 의미가 없으면 그저 의미가 없는 대로, 의미가 특별하다면 특별한 대로. 대상의 의미를 통해 존재 가치를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그는 헛간을 태우려야 태울 수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처럼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의 남자 친구와는 정 반대의 사람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알 수 있다. 여자 주인공이 왜 소설의 마지막 즈음에서 사라지고 만 것인지. 어딘가로 떠난 걸까, 누군가에 의해 납치라도 당한 것일까, 아니면 살해? 무엇이 됐든 그녀는 사라졌다. 왜 사라진 것일까. 그녀에게 남자 친구가 생기기 전, 그녀는 남자 주인공과 꾸준히 만나곤 했다. 남자 주인공은 그녀의 특별한 의미라 할 것 없는 이야기들을 좋아했다. 그녀의 팬터마임을 좋아했다. 왜냐하면 그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은 평화롭게 만나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 남자 친구가 생긴 것이다. 그 남자 친구는 헛간을 태우는 사람이다.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하는 존재는 사라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 남자 친구 곁에서 그녀는 사라질 수밖에 없었을 테다. 어느 순간 갑자기라기보다 일상에서, 꾸준히, 그녀의 존재가치는 그런 남자 친구에 의해 삭제되었을 것이다.


남자 주인공은 사라진 그녀를 꾸준히 걱정한다. 그리고 어느 날 태워질지도 모르는 동네의 헛간들을 매일같이 살핀다. 그는 존재의 의미를 걱정하는 사람이 아닌 존재 자체를 걱정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반면 그녀의 남자 친구는 그녀의 실종 앞에서 굉장히 무덤덤하다. 헛간에 불을 지르고 빠르게 달아나 멀리서 망원경으로 유유히 구경했던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도 이러한 일들이 수없이 일어나지 않는가. 아주 빈번히, 그리고 또 잔인하게. 영화 ‘버닝’은 소설 ‘헛간을 태우다’ 속 헛간과 여자 주인공의 의미를 사회적으로 조금 더 구체화시켜 스크린 속에 그려낸다.


‘버닝’의 여자 주인공 해미와 남자 주인공 종수는 번듯한 경제적 활동 수단을 가지지 못한 청년 계층을 대표한다. 종수가 밥을 먹는 동안 틀어놓은 뉴스에는 실업 청년들과 이주 노동자 관련 이야기가 나온다. 공장에서 종수를 비롯한 청년 노동자들은 이름이 아닌 1번, 2번, 3번 등으로 불린다. 그들이 일을 왜 하고 싶은지, 이 일이 그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등을 고용주는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저 야근과 특근이 쉬운 지, 혹시 집이 멀어 지각이나 결석이 잦진 않을지, 아무 때나 불러도 일하러 올 수 있는지가 궁금할 뿐이다. 즉 쓰기 편한 부품, 1번 부품, 2번 부품이 필요한 것이다. 이처럼 애초에 사회는 그들에게 의미를 물어보지 않는다. 물어보지도, 요구하지도 않음으로써, 그들의 의미를 삭제해버린다. 그렇게 사회는 헛간을 생산해내고, 태워버린다.


어느 날 해미가 엉엉 운다. 사라지고 싶다고, 지는 노을을 보다 나도 저렇게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죽는 건 너무 무서우니 아예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고 싶다고 말한다. 헛간을 ‘태워지는’ 존재로 그려냈던 소설로부터 영화는 한층 더 나아가 헛간을 ‘차라리 태워지고 싶어 하는’ 존재로 그린다. 해미는 스스로 태워지고 싶어 질 때까지 수도 없이 사회에, 타인에 의해 태워진 것이다. 그리고 끝끝내 차라리 태워지고 싶다고, 아예 없었던 것 마냥 사라지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만다. 이처럼 영화 ‘버닝’은 원작 소설에서의 장치와 상징들을 한층 더 구체적으로 표현해낸다.


헛간은 사실 명백한 강력한 악에 의해 희생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의 각박함과 냉정함 속에서 차츰차츰 도태되는 것이다. 동네 경찰들이 한낱 헛간에 관심을 주지 않듯 사회는 도태되는 약자들에게 쉽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헛간이 불타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그 누구도 슬퍼하지 않는다.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 회상하는 유년시절 연극은 이런 사회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아기 여우는 장갑 장수에게 다가가 돈이 모자라니 장갑을 조금 싸게 줄 수 없냐고 부탁한다. 어머니 여우의 손이 다 부르텄단다. 하지만 냉정하고 각박한 우리 사회가 장갑을 싸게 줄 리 없다. 장갑 장수는 이야기한다. ‘그럼 돈을 더 모아서 오렴.’ 영화 ‘버닝’에서는 연극에 대한 회상이 실제 종수의 어머니에 대한 회상으로 대체된다. 종수의 어머니는 남편의 폭력성을 견디지 못해 종수를 두고 가정을 떠났다. 소설 속,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이 유년 시절 처음 경험한 세계의 냉정 함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소설 ‘헛간을 태우다’와 영화 ‘버닝’은 이러한 냉정한 우리 세계를 직관적이고 감각적인 방법으로 지적하곤 한다.


남자주인공이 헛간과 여자 주인공을 꾸준히 살피고 걱정하듯, 우리가 존재 자체를 걱정하고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사실 모든 존재의 의미와 가치는 존재 자체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대상이라는 것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특별하다’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굉장히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단어이다. 누군가에게 특별하다고 판단되지 않아도, 존재는 그 자체로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따라서 나는 이 냉정하고 각박한 시대 속 헛간들, 태워져 사라지고 만 헛간들, 또 이 순간에도 태워지고 있는 모든 헛간들을 기억하고 애도하려 한다. 비록 흔적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더라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다름없다 하더라도, 그 한 평생은 모두 똑같이 소중한 것이거늘. 나는 그들의 흔적이 아닌 그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려 한다. 모든 존재는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이기에 매일 아침, 우리는 헛간을 살펴야 한다. 혹여 조금 그을리진 않았는지, 불이 붙진 않았는지 아주 자주, 정성 들여 살피곤 해야 한다.


무의미한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뒤집어 말하자면, 존재하는 것들은 전부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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