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용 소, 돼지, 닭은요? - 종 차별적 시선의 견고화
지난해 5월 길에서 태어난 하얀 털뭉치를 집으로 데려왔고 하루아침 나는 집사가 되었다. 골골송을 매일 듣는 대가로 온갖 수발을 들며 몇 계절을 보냈고, 어느새 나는 비건 지향인이 되었다. 완벽하지는 못해도 매일 노력하고 있다.
올봄, 나는 한 동물권행동 단체의 SNS 팔로우를 끊었다. 해당 단체의 행보가 동물권을 보호하기 위한 행보가 아닌 '개권', '고양이권'을 보호하기 위한 행보로 보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그들이 포스팅하는 글들은 주로 '길고양이 학대 반대', '유기견 구조', '동물들을 사지 말자' 등의 주제들을 가졌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강력하게 동의하는 문제들이었다. 나와 입장을 완벽하게 같이하는 단체라고 생각했다.
SNS 팔로우를 끊게 만든 한 포스트는 '식용견 반대'의 주제를 가진 글이었다. 언뜻 보면 맞는 말이다. 귀여운 강아지들을 쇠창살 케이지에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게 키워 보신탕집으로 납품하는 꼴은 잔인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문제는 자칫하면 '식용견 반대'에 대한 목소리가 개가 아닌 다른 동물들을 차별하는 목소리로 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그 단체의 해당 입장은 개의 지위와 개가 아닌 동물들의 지위 간 차등을 두는 종 차별적 시선을 야기한다. 쉽게 말해 그들의 그런 포스팅은 "개는 먹으면 안 되는데 소, 돼지, 닭, 생선 등은 먹어도 돼."라는 소리로 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해당 단체는 결코 종 차별적인 의도를 품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미디어의 논리는 그다지 이성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문제를 증폭시키다. '식용견 반대'에 대한 포스팅 수가 늘어나고 많은 미디어 수용자들이 그런 글들을 일상적으로 접한다고 생각해보자. 그들은 거의 당연히 식용견 반대에 동의할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식용견이 금지되어야 한다는 이슈는 그들에게 당연해질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저녁 식탁에서 매일같이 접하고 있는 소, 돼지, 닭 등의 동물권에는 그리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의 뇌 속에서 식용견 반대가 당연해지면 당연해질수록 개와 개가 아닌 동물에 대한 이중적 잣대 또한 당연해진다. 개권 옹호에 대한 자극은 늘어나는 반면 개가 아닌 동물의 죽음이 당연하다는 인식은 매일같이 식탁에서 다시 한번 견고해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종 차별적인 시선은 단순히 "다른 동물들이 서운해하겠다~"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엄마가 어렸을 적 동생한테만 월드콘을 사주는 그런 문제 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옳음을 향한 목소리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식용견 생산 금지 법안이 통과는 어쩌면 공장식 가축 산업 전체 금지 법안 통과를 향한 초석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모든 일이 일어난 후 결과에 대한 이야기이지,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옳음을 지향하고자 하는 단체의 목소리는 결코 비일관적이어서는 안 된다.
해당 단체가 '개권', '고양이권'을 위해 행동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쟁취하고자 하는 동물권의 '동물'에는 개와 고양이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직 개와 고양이에게만 주로 초점을 맞춰 목소리를 내는 것은 쉬운 문제만 풀려하는 비겁한 태도이다. 개는 귀엽게 생겼다. 사람을 잘 따르고 많은 이들의 가족 구성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개/고양이의 권리를 옹호하는 목소리를 내면 거의 인류 전체의 동의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갑자기 그들이 보호하고자 하는 동물권의 대상을 최대한으로 넓혀 '우리 함께 비건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합시다.' 하는 입장의 글을 포스팅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조금 욕심을 줄여 '공장식 가축 산업을 타파합시다.' 하는 입장의 글을 포스팅한다 해도 마찬가지이다. 인류 전체 중 반 이상은 싫어요를 누를 것이다. 그런 글들을 올린다면 그들은 자본주의 자유주의 효율주의 그리고 밥상 위의 고기를 탐하는 인간의 욕구 전체와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대체 그들이 개/고양이 위주의 포스팅을 함으로써 맞서게 되는 적은 누구인가? 고작 해봐야 '펫샵 산업 종사자', '식용견 산업 종사자', 그리고 찌질한 동물학대 범죄자들 아닌가? 강자와 다수를 적으로 세우지 못하고 누구나 쉽게 동의할 문제들만 건드리는 그들의 행보는 비겁하다.
물론 그들이 정말 개와 고양이만 중요시한다면, 공장식 가축 산업에 전혀 문제 제기를 하고 싶지 않아 한다면 말이 달라진다.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에 충실한 행보를 잇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동물권 행동' 단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고, 비건주의 등에 대해서도 동의하며 동물권 전반에 대해 존중하는 사회를 지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개와 고양이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일어나고 있는 현상의 원리와, 옳음의 근거는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 개/고양이의 귀여운 모습? 사람을 잘 따른다는 사실? 이유가 어찌 됐든 인간 중 더 많은 수가 개 고양이를 다른 동물들보다 사랑하고 있는 것은 이미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며 사실이다. 하지만 이 사실이 종 차별과 이중적 잣대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옳음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논리가 그렇게 단순해서는 안된다.
해당 동물권 행동 단체의 지속적인 식용견 반대 포스팅은 "개는 먹으면 안 되고 다른 동물들은 먹어도 된다."는 이중적 잣대를 재생산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식용견 문제에 대한 그들의 입장만이 이중적 잣대를 재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길고양이 학대 사건, 유기견의 처참한 모습 등에 분노하는 대중들을 우리는 많이 볼 수 있다. 나도 그들 중 하나이다. 하지만 그런 대중들 대부분은 식탁 위에 올라오는 맛있는 고기들이 길고양이보다 더 잔인하게, 빠르게, 대량으로 죽어간다는 사실을 쉽게 인지하지 못한다. 또한 그에 그다지 분노하지 않는다. 현재 대한민국 국민 청원 홈페이지에 '길고양이 학대 범죄자들을 강력하게 처벌해주세요'하는 글은 몇 있지만 '매일 천문학적 숫자의 살생을 저지르는 돼지 농가를 처벌해주세요'하는 글은 없다. 평생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심지어 평지에 제대로 한 번 서보지도 못한 채 정신병에 걸려 남의 털을 쪼아 뽑다가 금세 죽임 당하는 것이 학대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대중들이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이것은 접근성의 문제다. 나는 길에 나서면 쉽게 볼 수 있는 개/고양이와 달리 달리, 태어나서 한 번도 살아있는 소, 돼지, 닭, 양 등을 실제로 본 적이 없다. 공장식 가축 농가는 우리가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마주칠 수 없는 외곽에 도심으로부터 분리되어있다. 우리가 그 동물들을 마주하는 것은 오직 식탁 위에서이다. 그러니 그들이 생명보다는 음식으로 인식되는 것이 당연하다. 또한 그런 인식이 깨지는 것을 인간은 두려워한다. 어느 저녁 불고기 전골을 맛있게 먹고 있는 아빠 앞에서, 태어나자마자 비료 생산 기계라는 대형 믹서기에 갈리는 수평아리에 대해 엄마와 이야기하다 혼났다. 많은 사람들이 길고양이 학대 사건은 궁금해하지만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 수백 마리가 한 프레임에 담기는 다큐멘터리는 별로 보고 싶지 않아 한다. 내일도 식탁에서 평범한 식사를 하고 싶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마음이다.
따라서 옳음을 지향하는 단체, 특히 동물권 전체를 옹호하고자 하는 단체는 이미 기울어진 마음을 가진 대중들에게 적어도 양 편에 동일한 정도의 자극을 제공해야 한다. 더 이상 종 차별적 인식 및 이중적 잣대를 재생산해서는 안된다. 개를 위한 게시글을 하나 올렸으면 돼지를 위한 글도 하나 올려줘야 한다는 얘기다. 이왕이면 돼지를 위한 글을 두 개 올려줬으면 좋겠다.
(해당 동물권 단체가 당시 아주 가끔 가축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생매장당하는 동물들을 동정하는 글을 포스팅하곤 했다. 당시 해당 단체에서 포스팅하는 글 중 거의 유일한 '개/고양이가 아닌 동물들에 대한 글'이었다. 한승태 작가님의 <고기로 태어나서>라는 책의 한 대목을 인용함으로써 여전히 나의 비판적 입장 유지하고 싶다. "가축 전염병이 발생하면 수백만 마리의 동물들이 생매장당한다. 매몰 처분을 하게 되면 땅을 파고 동물들을 쏟아붓고 다시 흙으로 덮는다. 이런 광경은 치솟는 고깃값에 대한 우려와 함께 사람들의 동정심을 자극한다. 땅속에 파묻힌 동물에 대한 관심은 개평처럼 찔끔찔끔 표현되는데 이마저도 현실과 동떨어진 인식이라는 소리를 듣곤 한다. 하지만 그런 동물들이 약간의 관심이라도 받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판매 가능한 상품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