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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스텔라 Apr 17. 2024

대한독립만세!

학창 시절에야 ‘4월의 시작’보다 크게 다가왔지, 사회인이 되고 나서는 “벌써 1분기가 끝났네. 3월도 다 지나갔네” 하는 마음으로 시작하는 날이 바로 4월 1일 만우절이다.

성인이 되어서 한 거짓말은 맘카페에서 유행했던 ‘임신고백(남편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임신했다고 하거나 쌍둥이를 임신했다고 하는 거짓말인데 의외로 속는 사람들이 많다)’ 정도 일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의 만우절 추억의 지분은 거의 대부분 학창 시절이 담당하고 있다.



제일 기억에 남는 만우절 장난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만우절 장난이라는 게 생각보다 성공을 위한 조건이 많다. 1순위는 장난을 웃음으로 잘 받아줄 만한 선생님이나 우리가 기대한 반응을 보여줄 수 있는 선생님의 수업이어야 한다. 전자의 경우에는 혼나지 않아서 좋고, 후자의 경우에는 혼나더라도 뿌듯해서 좋다. 아무리 재밌는 장난이라도 학생주임 선생님이나 담임선생님 시간에는 후환이 두려워 잘 안 하게 된다. 그래서 주요 타깃은 갓 부임한 선생님이나 미혼의 총각 선생님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장난을 주도해서 태연하게 연기할 수 있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여러 명이 참여할수록 효과적이기 때문에 반 아이들의 협조도 필요하다. 사실 선생님들도 매년 겪는 일이라 얼마간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수업에 들어오시기 때문에 극적인 효과를 보려면 이 모든 조건을 더해 참신한 아이디어가 필요했다. 


옷 거꾸로 입기, 옆 반이랑 반 바꾸기, 교실 앞 뒤 거꾸로 해놓기, 이런 일들은 중학교 때도 많이 했으니까 시시했다. 지금은 참고할만한 재미있는 콘텐츠들을 실시간으로 무료로 볼 수 있는 곳이 많지만, 내가 고등학생 때는 하이텔, 나우누리, 천리안 같은 인터넷 커뮤니티들은 유료로 가입해야 들어갈 수 있어서 상대적으로 나이가 있는 대학생이나 성인들이 주로 이용했다. 그래서 우리 또래의 재미있는 이야기들은 라디오를 통해 듣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만우절 즈음해서는 라디오에서도 사연을 받기 때문에 그 사연들을 토대로 우리만의 계획을 세웠다. 아이돌을 좋아하던 친구들은 ‘오빠들’이 게스트로 나오는 프로그램을 꼭꼭 챙겨 들었기 때문에 각자가 나눠서 라디오를 듣고 사연을 수집한 뒤 그중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걸로 하기로 했다.  


우리는 ‘삐삐세대’이었던지라 반 아이들 중 절반 정도는 삐삐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들을 모아서 12시가 되면 알람이 울리도록 설정해 놓고 교실 뒤에 있는 사물함에 넣은 뒤 얌전하게 수업을 듣는 척했다. 한창 수업 중이던 12시!


삐비비빅 삐비비빅

삑삑 삑삑 삑삑

삐리릭삐리릭 삐리릭삐리릭  


교실 뒤에서 온갖 삐삐 소리가 울리자마자 한가운데 앉아있던 반장이 벌떡 일어나서 큰 소리로 외쳤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나를 비롯한 몇몇 아이들은 종이에 급조한 태극기를 흔들며 같이 외쳤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나머지 친구들은 부끄러워하면서도 슬그머니 손을 올려 만세를 했다. 


올해 처음 여고에 발령받은 총각 물리 선생님은 “나도 같이 안 하면 일본 순사 되는 거야?”하시며 새빨개진 얼굴로 만세 삼창을 하시더니, 독립을 염원하는 마음을 보여주신다며 수업을 일찍 끝내준다고 하시곤 도망가셨다. 한창나이의 먹성 좋은 여고생들에게 대한독립보다, 아니 대한독립만큼 좋은 이른 점심시간 덕분에 아까는 수줍어했던 친구들도 이번에는 진심으로 만세 삼창을 외칠 수 있었다. 

덧붙이자면 우리의 만우절 만세삼창은 원래 더 큰 그림이 있었다. 바로 일본어 선생님 시간에 하는 것이었는데 이 일을 위해 전교생의 시간표를 다 찾아보다가 알았다. 일본어 선생님이 점심시간에 아주 예민하셔서 절대로 4교시에는 수업을 맡지 않으신단 사실을! 누가 됐든 4교시 일본어 시간이 있는 반에 우리의 고급 정보를 넘겨주려고 했던 계획은 그래서 실패하고야 말았다는 안타까운 후일담이다. 



이 날 하나 된 추억 덕분일까. 우리 반은 비록 공부는 못했어도 단합을 요구하는 일만큼은 항상 학년에서 1등을 도맡아 했다. 체육대회, 수련회 장기자랑, 환경미화 등 오직 공부만 빼고는 뭐든지 잘했다.   

학창 시절의 만우절은 단순히 거짓말을 하는 날이었기보다는 새 학년, 새 반의 어색하고 서먹한 기간을 지나 조금씩 친해지는 반 아이들을 단합시키는 작은 이벤트의 날이 아니었나 싶다. 그랬기에 선생님들도 적당한 장난은 같이 장단을 맞춰 주셨는지도 모른다. 요즘 아이들은 어떤 식으로 만우절 장난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이렇게 먼 훗날 생각해도 웃음이 나는 즐거운 추억들을 많이 만들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다. 



*원래는 4월 1일 만우절에 맞춰서 올리고자 시작한 글이었으나, 지난 몇 주간 건강상의 문제로 인해 전혀 글을 쓸 수가 없었다. 만우절은 이미 지났지만 이제라도 퇴고하여 올려본다. 이 글을 보시는 모든 분들은 꼭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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