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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단조 Aug 10. 2016

미국에서, 나무 하던 날

미국에서, G


토토로 언니에게.


여행의 시작, 언니네 가족은 지금쯤 어떤 풍경을 마주하고 있을까요.

밴쿠버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도쿄로 향하는 그날까지

알차게 삶을 즐기는 언니의 모습이 무척 멋져요. 


함께하고 싶지만, 다음 기회를 기약해야 했던 저는, 

매일 육아에 집안일 하는 똑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답니다.

이런 매일 똑같은 일상이 조금은 지겨워서, 지난달부터 벼뤄왔던 작업이  하나 있어요. 

바로 '전면책장' 만들기.


이케아에 가서 사 온 액자를 세워두는 목적의 선반 하나를 전면책장으로 사용해보니,

맨날 책등만 보고 살던 저로서는 오며가며 책표지를 보는것만으로도 대단한 힐링이 되었거든요. 

아래로 같은 선반을 두개정도 더 설치해볼까 생각해보았지만,

저희집은 온사방이 석고벽이라 앙카 박는 일도 만만치 않을 뿐더러, 

앙카를 잘 박아놔도 석고벽이 뜯어지는 일도 생겼기 때문에,

뭐든 잡아 당겨보기를 좋아하고 힘조절 안되는 둘째때문에라도 안되겠다 싶었지요.


그리하여, 최소한의 앙카만으로 벽에 설치할 수 있는 전면책장을 구상해서 그려본 후,

목재를 사서 직접 만들기로 결심하게 되었어요.

제 이런 결심에 대한 남편의 반응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아요.

"그냥 사서 쓰자." - 사려면 내가 원하는 사이즈도, 디자인도 없을 뿐더러, 비슷한 걸 사려니 100불이 넘어 부담되는 가격이었어요.

"그냥 없으면 없는대로 살지." - 아시겠지만, 우리 남편은 모든 상황속에서 불편함과 부족함을 기막히게 잘 견디는 사람이에요 ^^

삼시 세끼 요리해 달라면 콧노래 부르며 기꺼이 해 줄 사람이지만 이케아에서 사 온 가구 조립해달라면 하루 이틀 일주일 미루는 사람이기도 하지요.


남편의 반응이 늘 그러하니, DIY 작업에 있어선 남편에게 최소한으로만 부탁하는 게 제 원칙이에요.

남편 도움 없이, 공구라곤 전동드릴과 싸구려 목공용톱밖에 없는 저로서는 믿는 구석이 있었는데

바로 이 곳에 와서, 언니네 가족처럼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보이는 C네 집 공구들이었지요.

제가 DIY가구를 만들고 싶다 하니 언제든 우리집 가라지에 와서 작업하라 하셨던데다,

C아버님은 어마어마한 공구를 갖추고 계시며 집의 대부분의 가구를 손수 만드신 목공 DIY의 제왕이시거든요. 

지난번 캠핑도 함께 했었고, 여기 와서 우리가 만난 분들 중 가장 좋아하는 가족인데,

남편도 C네 가족을 무척이나 좋아해서 이 분들 만나는 일엔 언제나 적극적이에요.


몇주간 구상만 하다가 C네 아버님께 우선 제 구상에 대한 조언을 구하고, 나무 고르는 팁도 얻은 후 홈디포로 향했지요. 

(일본에서는 집 근처 시마츄나 D2가 있었다면, 미국에는 홈디포(Home depot)와 로스(Lowe's)가 있네요.) 

DIY가 생활화되어 그런지, 일본보다 훨씬 더 규모가 크고, 세분화된 공구들을 팔고 있었는데,

일본에서도 목재 고를 때 한국이랑 이름이 달라 애를 먹었던것처럼, 여기서도 처음에 어리둥절했답니다.

목재를 lumber 라고 한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지요.

제 맘에 썩 드는 목재는 없어서 결국 썩 맘에 들진 않지만 가장 싸고 뒤틀리지 않은 녀석으로 골랐고,

결국 못 산 재료들은 어느정도 만든 후에 사야지, 하고 생각했더랬어요.

싸구려(?) 각목으로 총 12불어치의 나무를 사는데 쇼핑 소요시간은 1시간. 

잠든 아이들때문에 차에 있었던 남편은 얼른 사고 와달라고 부탁했는데

그 넓은 매장에서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며 안절부절하던 저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답니다.


긴 나무를 차에 너끈히 싣고 나니, 일본에서 자전거 뒤에 아이를 태우고 한 손에 목재를 들고 운전하던 고달팠던 길이 떠올랐어요.

그 때에 비하면, 나무가 충분히 들어갈만한 큰차가 생겼으니, 그나마 삶의 질이 좀 나아진 거라고 믿어도 될까요.


그 길로 C네 집으로 간식을 사들고 가서 한참 수다를 떨고 나서야 작업을 하러 가라지로 나갔는데,

가라지의 어마어마한 디월드 공구들을 마주하니, 그 어떤 옷가게에 들어갔을 때보다 '갖고싶다'는 욕망이 끓어올랐지요. 

두 가지 종류의 전동톱으로 나무 몇 컷 자르는 일은 별 일 아니리라 생각했는데,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습하고 무더운 8월의 찜질방스러운 휴스턴 날씨는  

에어컨이 없는 가라지에 서 있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더군요.

사이즈를 재려 줄자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연필로 나무에 표시하는 것만으로도,

전기톱 사용하기 전에 귀마개를 꽂는 일만으로도,

괜히 일 벌였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으니까요.


톱을 빌려가려고 하니 크기도 크고 무게도 무거운데다, 사용하기도 위험하다 하여 온 것인데,

결국은 이 더운 날 C 아버님까지 고생시키고 말았지 뭐에요.

제 필요에 맞게, 1mm의 오차도 없게, 안되는 게 없게. 정성껏 톱질을 해주신 후

톱밥이랑 땀이 뒤범벅된 C아버님을 마주할 때 들던 죄책감이란....


커트만 해서 가져간다 하니 이후 만드는 과정에 대해 이런 저런 팁도 주셨고, 

샌딩기를 빌려주시며 샌딩작업이 보통이 아닐텐데 이걸 어떻게 다 하실거냐며 걱정도 해 주셨어요.

그렇게 작업을 마치곤 함께 저렴한 샐러드바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대접할 기회를 겨우 허락받고는, 

집에 돌아와서는 바로 쓰러져 잠들어 버렸어요.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저는 흥분된 마음으로, 차로 목재를 가지러 갔어요. 

몇 차례에 걸쳐 패티오로 옮기며 '샌딩은 해가 떨어지면 해야 할까나.' 하고 걱정하는데 

남편이 이렇게 말하는거에요.


"그거 내가 할게. 너 혼자 못할거야."


으응?

제 귀를 의심했어요.

남편이 해준다고?


"어제 샌더기 사용하는 방법 내가 들었는데.... 쉽지 않다더라고..."


어제, 톱질하는 옆에서 자기도 배워보겠다, 한 번 잘라 보겠다 할 때도 의외다 싶었는데,

세상에, 좋아하는 형님도 늘상 하는 일이라 마음이 조금 열린 걸까요.

이케아 가구조립도 꺼려하는 남편의 태도가 어쩐지 조금 다르게 느껴지네요. 

좋은 이웃의 영향으로, 

남편이 제 취미생활에 대해 조금은 마음을 열게 된 것이라 믿고 싶을 만큼.


더운 여름, 시끄러워도 괜찮은 낮시간 에어컨 없는 바깥에서 작업해야 하는 일인데, 

남편을 부려먹었다가 남편이 DIY 가구 만들기를 싫어하게되면 안되니 사포질은 제가 해야죠.

오늘은, 아이들 돌보다가 짬짬이 마스크 쓰고, 안경 쓰고, 더운 패티오에서 사포질을 하며 하루를 보냈어요.

오른팔이며 손목이 진동때문에 욱신거리지만, 그래도 이렇게 몸 쓰고 땀 흘리고 나면 기분이 좋아져요.

무기력한 일상 중 이런 막노동은 저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이에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월급없이, 눈에 보이는 것 없는 일만 하는 주부의 일상에, 

이런 제작의 소소한 성취감은 나도 생산성 있는 인간이라는 자존감도 키워주는데다, 

일터(?)에 놓인 맘에 드는 가구는 애사심(?)에도 큰 도움을 주거든요. 


더 고운 사포를 사와서 추가작업을 해야 하니, 며칠이 더 걸릴 지 모를 일이에요.

까칠해진 내 맘도 함께 싹 다 밀어내고 싶네요.


나도 함께 하고팠던 로드트립, 

언니네 가족의 즐거운 여행 소식을 기다릴게요.

연어 잡아먹는 곰, 꼭 보시기를!


미국에서,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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