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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나를말하는사람 Nov 19. 2024

완벽을 기다리며 흩어진 것들

열정의 가면을 쓴 완벽주의

매일 저녁 식사 후, 나는 식탁을 바라본다. 정확히 말하자면, 식탁 아래를 바라본다. 그곳에는 어김없이 아들이 흘린 빵 부스러기와 밥알, 작은 과자 조각들이 마치 작은 섬들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매번 식사를 마치고 나면 꼭 그렇게 바닥에 무언가가 떨어진다.

어쩌면 지금 당장 청소기를 꺼내 돌리는 게 맞을 것이다. 그래야 내 마음속에 쌓이는 이 찝찝한 기분도 어느 정도 해소될 테니까.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먹은 그릇을 치우고 식기세척기에 넣는 것만 해도 벌써 8시. 아이 숙제며 씻기고 재우는 시간을 생각하면 청소기를 돌릴 여유도 남아 있지 않다. 저 작은 부스러기들은 결국 늘 마지막 순위로 밀려나고 결국 나는 그저 못 본 척한다.


그곳뿐이랴. 싱크대 주위 바닥에는 언제 떨어졌을지 모를 바싹 마른 파 한 조각, 라면 조각 몇 개, 김가루, 말라비틀어진 양파 같은 요리의 흔적들이 싱크대 가장자리를 따라 흩뿌려져 있고, 그냥 보면 잘 안 보이지만 빛의 방향에 따라 보이는 물때, 언제 묻었는지 모를 찌든 때 같은 것들에 매번 시선을 빼앗긴다. 일단 지금 그릇 정리를 끝내고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해보며, 저 얼룩을 내가 닦을지 말지 우선순위를 머릿속으로 결정한다.

식기세척기를 돌리고 나면 건조기 빨래는 꺼내놓고, 세탁된 빨래를 건조기로 옮겨 담고 빨래를 개야 한다. 그럼 얼룩은 일단… 우선순위가 아니다.


건조기에서 빨래를 꺼내고 세탁된 빨래를 건조기로 돌린 후 2층으로 올라간다. 아이에게 이제 씻을 시간이니 올라오라고 소리치면서.

2층 안방 침대 위에 빨래들을 내려놓는다. 바닥엔 내 머리카락들이 여기저기 막 굴러다니는 게 보인다.

‘청소기를 가지고 올까… 10분만 대충 밀면 되잖아.

아 근데 내가 분명히 아들한테 올라와서 씻으라고 했는데 왜 안 올라와?’

다시 큰소리로 부른다.

“빨리 와~ 씻어~”

아들은 오늘 마술에서 배운 반지를 가지고 올라왔다. 그걸 보여준다고 이리저리 만지다가 손에서 떨어져 또르르… 침대 밑으로 들어간다.

마침 전기파리채가 있어 그걸 들고 엎드려 침대 밑을 숙여서 본다. 마치 먹구름처럼 쌓인 먼지들…

뭉쳐 다니는 먼지는 내 머리카락을 꽉 움켜쥐고 있다.

상황이 적당해야 대충 치우자는 생각이 들지. 이건 그냥 포기다. 반지를 꺼내주고 더러워진 손을 씻고 다시 빨래를 개면서 씻으라고 한 번 더 아들에게 말한다.

“자, 옷 벗고 이제 씻으러 들어가~”


이번에 로봇청소기를 갑작스럽게 산 것은 사실 충동구매라고 할 수는 없다. 너무나 긴 시간 동안 고민했지만 무언가가 여태껏 막아왔을 뿐이다.

그런데 왠일인지 자, 지금이야. 해보자. 라는 마음이 들었다. 내 속의 또 다른 나는 이 마음이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까 봐 조급해하며, 얼른 결제해버렸다. 이건 마치 내 몸의 움직임을 담당하는 청소부 자아와 결제를 담당하는 소비 자아의 환상의 콜라보였달까.

게다가 요즘 시대는 결제만 하면 바로 다음 날 배송되는 쿠팡의 시대다.

청소부 자아가 마음을 바꾸기 전에 제품도 도착하면서, 로봇청소기를 위한 정리가 시작되었다.


먼저 1층에 로봇청소기의 위치를 정했다. 지금 화분 두 개가 자리 잡고 있는 창가 바로 앞. 화분 두 개 중 하나는 이미 물을 제때 주지 못해 말라버렸다. 미안한 마음이 한편에 있었지만,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다는 생각에 애도할 시간은 없었다. 축 늘어진 옆 화분은 화장실로 옮겨 물을 줬다.


바닥에는 멀티탭과 거기에 꽂힌 전선들이 마치 얽히고설킨 뱀들처럼 무질서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전선들 주변으로는 먼지가 몇 개씩 뭉쳐 굴러다니고 있었다. 나는 일단 벽에 있는 멀티탭 코드를 뽑고 전선을 모두 빼서 차곡차곡 정리했다.

멀티탭 하나에는 거실의 LP플레이어, 하나는 식탁으로 가야 할 또 다른 멀티탭, 하나는 집 CCTV 전선을 차례대로 꽂고, 멀티탭은 멀티탭 정리함에 넣었다.

LP플레이어에서 나온 전원선은 실타래처럼 얇고 구불구불했는데, 끝부분에 굵은 어댑터가 있어 멀티탭으로 가는 길이 짧았다. 결국 어댑터를 선반의 밑부분에 양면테이프로 붙여야 했다. 선들은 선반 뒤쪽으로 넘겨 테이프로 고정시켰다.

CCTV는 벽 선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데, 그 선 역시 구불구불한 S자를 그리며 벽 선반 밑부터 CCTV가 위치한 곳까지 따라가 있었다. 나는 그 선을 벽 선반의 틈새를 따라 테이프로 고정시켰다.


벽에서 식탁 쪽으로 가야 할 전선은 바닥에 닿지 않게 벽을 따라 식탁까지 붙여 나갔다. 식탁 다리 뒤에 전선을 고정시키고, 식탁 위 끝단에 식탁용 멀티탭 정리함 안에 멀티탭을 넣었다. 식탁 위 멀티탭에는 C 타입 충전기 2개와 아이폰용 충전기를 꽂고 정리함을 닫았다.


무거운 것을 들고 나르는 일이 아닌데도 땀이 뻘뻘 흘렀다. 시간은 벌써 1시간이 지나 있었다.


거실 옆 손님방의 상태는 심각했기에 더 서둘렀다. 나뭇가지 모양의 옷걸이에는 몇 겹이나 걸려 있는지 모르는 옷들 때문에 비둥비둥 흔들리고 있었다. 남편의 검정색 가을 자켓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는데, 이미 다른 옷들이 몇 개 걸려 있어 거는 부분이 뭉툭해져서 미끄러진 것 같았다.

소파 위에는 남편의 바지 두 개와 또 다른 외투 하나가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고, 소파 커버는 밀려 내려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바닥에 있는 옷, 소파에 있는 옷, 옷걸이에 있는 옷 모두 걷어서 빨래할 것은 빨래통에, 나머지는 스타일러에 넣고 돌렸다.


이제 바닥에 남은 건 팬트리 바닥에 있는 쌀 한 가마니와 여러 큰 냄비들, 그리고 현관 앞에 있던 할로윈 물품들이었다. 쌀 한 가마니는 지퍼백 5개로 소분해서 김치냉장고에 넣었고, 큰 냄비들은 팬트리에 자리를 만들어 올려놓았다. 할로윈 용품 보관 박스는 옥상 창고로 낑낑대며 들고 올려다 놓았다.


이제 2층이다. 2층 화장대 옆 자리는 그야말로 헤어 용품과 도구, 화장 도구의 무덤 같은 곳이었는데, 여기를 치워야지 치워야지 생각만 했던 것을 이제야 실행하다니 로봇청소기에게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화장솜 두 박스와 메이크업 스펀지 한 봉지, 가로 세로 약 30cm 정도 되는 거대한 콜대원 선물 박스가 쳐박혀 있었던 것을 빼냈다.

역시나 청소기가 지나갈 수 있도록 공중부양을 시키는 것이 목적이기에 멀티탭을 화장대 옆면에 양면테이프로 붙이고, 드라이기 거치대도 붙여서 선이 바닥에 닿지 않게 만들었다.

침대 옆 바닥에 있던 멀티탭도 협탁 위로 올려 고정시켰다.


이제야 진짜 로봇청소기가 들어올 준비가 끝났다.


현관에는 물걸레 자동세척 기능이 있는 1층용 청소기 하나와, 물걸레 키트를 끼는 방식의 2층용 청소기 두 개가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몸집이 크고 묵직한 박스였지만, 나는 빠르게 포장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박스에서 제품을 꺼내며 차근차근 설명서를 읽고, 앱에 제품 등록까지 막힘없이 끝냈다.


로봇청소기 두 대는 각각 1층과 2층을 돌아다니며 맵을 그리기 시작했다. 기계가 집안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동안 나는 침대에 기대 누워 지켜보았다. 완전히

지쳤고 만족감이 몰려왔지만, 동시에 조금 어이가 없었다.

’왜 나는 이렇게 한 번에 몰아서 하게 되는 걸까? 왜 미루다 한꺼번에 터지는 열정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게 되는 걸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지난주에 아이의 심리검사를 진행했던 상담사가 말했던 한 문장이 떠올랐다.

“완벽주의 때문에 생기는 비효율적인 프로세스가 문제가 될 수 있어요. 그러다 보니 결과적으로 만족스럽지 않을 수도 있거든요.”


그 말이 나를 겨냥한 것처럼 느껴졌다. 완벽한 결과를 원하면서도, 너무 높게 잡힌 기준 때문에 시작조차 하기 어려워지는 상황. 그리고 그런 일을 실행에 옮기려면 거대한 에너지와 각오가 필요하다 보니 결국 모든 것을 미뤄왔던 것이다.


확실한건 이렇게 한순간의 불꽃 같은 열정과 끊임없는 미룸의 반복만으로는 행복하게 살 수 없다.


그럼에도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더 높은 수준을 여전히 그리고 또 바란다. ‘열정이 조금 더 꾸준했으면 좋겠어. 그 반짝이는 순간이 좀 더 오래 머물렀으면 좋겠어.’ 생각의 방식을 한순간에 바꾼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깨닫는 순간부터가 새로운 시작이라는 점이다. 내가 정말 더 나은 방향을 알게 되었다면, 조금씩 노력해볼 참이다.


로봇청소기를 구매한 것은 최근 몇 년간 내가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다.

정리되지 않은 집, 청소되지 않은 바닥, 쌓여만 가는 할 일들. 그것들은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집안일일 뿐만 아니라, 내 삶 속 어딘가에서 미뤄두고 방치해 둔 나 자신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나는 완벽하지 못한 현실 속에서 늘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그 문제를 대면하기보다는 차곡차곡 미뤄둔 채 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그 미룸의 무게가 한순간에 폭발하듯 모든 것을 정리하려는 나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내가 무언가를 미룰 때마다, 머릿속 깊은 곳에서는 이런 생각이 맴돌고 있었다.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야지.’ 그런데 그 “제대로”라는 기준이 너무나 높았다. 조금은 지저분한 바닥도, 얽힌 전선도, 정리되지 않은 물건들도, 그 자체로는 사실 당장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의 마음속에서는 그것들이 늘 “완벽하게 정리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작용했다.

그런데 완벽함은 언제나 거대한 에너지를 요구했고, 나는 그 에너지를 모으기 위해 끊임없이 미루며 기다렸다. 그렇게 미룬 끝에 결국 폭발하듯 모든 것을 한꺼번에 처리하고 나면, 다시 지쳐버리는 악순환.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스스로에게 말해본다. 내 삶은 결코 완벽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닐것이다. 이제 나는 한순간의 열정에만 기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꾸준히 앞으로 나아갈 방법을 고민해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렇게 한 걸음씩, 나는 더 나은 나로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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