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9일의 악필 편지
한 해 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요. 당신은 글쓰기 모임 카페 운영을 다시 시작했고, 새로운 출발을 위해 2년간 몸 담았던 직장을 떠났습니다. 작년에 떨어졌던 자격증 시험을 올해는 붙었습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평생 연이 없을 것 같았던 운동도 시작했지요.아, 오랜만에 연애도 시작했군요. 이만하면 당신은 꽤 괜찮은 한 해를 보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변화는, 당신이 드디어 심리상담사가 되었다는 것 같습니다. 인턴이라는 직급이나마 달고 상담 센터에서 내담자를 만나기 시작한 것이지요. 너무 의존적이어서 상담 시간이 아닌데도 자꾸 연락하는 내담자도 있었고, 반대로 노쇼를 밥먹듯 하는 내담자도 있었습니다. 어느 쪽이든 당신은 골치가 아팠어요. 내담자가 왜 저러는지 이해하려 심리검사 결과를 들여다볼수록 더 알쏭달쏭했지요.
이토록 당신이 타인을 치열하게 이해해보려 애써본 적이 있었을까요? 그러나 치열함이 일상이 되자 그 열기는 빠르게 사그라들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담자가 어떤 행동을 해도, 어떤 말을 해도 당신은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해하려 애써도 이해하기 어려울 거란 생각이었지요. 막연하게 상담을 오래 이어가면 시간이 해결해주리라 믿을 뿐이었습니다.
시원하게 울고 싶은데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며 한 내담자가 당신을 찾았습니다. 그 내담자는 자꾸 자신이 죽는 상상을 한다고 호소했지요. 메이크업을 해주는 사람이 돌변해서 내 눈을 찌를 것 같고, 창문을 열어달라는 부탁을 들어 주러 등을 돌리면 그 사람이 칼로 자신을 난도질할 것 같다는 상상을 멈출 수가 없답니다. 근무 중에 갑자기 비명을 지르고 싶다는 충동도 있었지요. 그런 이야기에 당신은 담담했습니다. 그렇구나, 힘들겠네. 그게 당신의 속마음의 전부였지요.
그랬던 내담자가 연락이 끊기고, 상담에도 빠졌습니다. 걱정도 되고 서운하기도 한 마음에 당신은 상담을 감독하는 교수님께 여쭤보았지요. ‘교수님,이 내담자가 왜 이럴까요?’ ‘이 내담자는 자꾸 배신당하고 뒤통수를 맞았잖아요. 심지어 가족에게도요. 그래서 사람을 못 믿는 거예요. 사람들이 언제 나를 돌변해서 공격할지 모른다고 불안해하는 거죠. 자기를 방어하고 싶어서 그런 상상을 하는 거예요. 얼마나 외로웠겠어요, 또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랬구나. 너무 외롭고 힘들었구나. 그런데 내가 그걸 몰라줬구나… 울고 싶어도 눈물이 안 나온다면서도, 가끔 당신에겐 눈물을 보이던 내담자였습니다. 그건 세상 사람들 누구도 못 믿지만, 상담사에게만큼은 마음을 열 수 있었다는 뜻이었겠지요. 그런데 그런 마음을 상담사인 당신은 몰랐던 것이지요. 감독을 받던 중 당신은 눈물을 찔끔 흘렸습니다. 그 내담자가 당신과의 상담에서 그랬던 것처럼요.
당신이 무심하게 임했던 상담의 매 순간마다 내담자는 절박할 수도 있다는 것을 당신은 알았습니다. 상담사로서 책임감을 깨달았다고 해도 좋겠지요. 이제 당신은 또 고민합니다. 또 이런 상황이 찾아온다면 조금 더 능숙하게 대응할 수 있을지, 당신이 좋은 상담사가 맞는지, 앞으로 계속 상담의 길을 걸을 수 있을지…
아마 내년은 이 질문에 답을 찾는 한 해로 보내게 될 것 같아요. 상담사로 살아가는 남은 시간 내내 고민해야 할 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중요한 건 고민을 시작했다는 것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고민은, 당신을 조금 더 성숙하게 만들어 주겠지요. 한 사람쯤은 가슴에 더 품을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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