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섯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 #3
현재 지내고 있는 홈스테이의 주인 할머니가 친절하다니 다행입니다. 할머니 음식이 맛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금 웃었는데, 제 생각에는 영국에 어떤 홈스테이를 가도 음식 맛은 비슷할 것 같습니다. 어학원에는 사우디 아라비아와 리비아에서 온 중동 아저씨들이 많다구요. 그분들은 아마도 대부분 국가에서 생활비와 장학금을 지원받고 오시는 분들이라 가족들도 함께 오고 생활도 여유로워서 조금 부럽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어학원을 마치고 홈스테이에 돌아가 홀로 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니, 또 “나는 누구일까?” “나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질문을 하게 되는 그 시간이 어쩌면 참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저는 2주 후에 100명 가까이 모이는 전체 팀 미팅에 참석을 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1시간 정도 브랜드와 디자인에 대해서 발표를 해야 합니다. 저의 발표를 듣게 될 청중들의 대부분은 제품 개발을 담당하는 R&E 소속의 제품 개발자와 엔지니어 분들인데, 그분들이 저의 발표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가질지, 저 또한 그분들이 흥미롭게 들을 만한 내용을 준비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됩니다. 사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할 정도로 저는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제 부족한 지식과 발표 실력 때문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는 것은 아닐지 걱정됩니다. 내가 과연 무언가를 해내기에 충분한 사람일까 어쩌면 앞으로도 새로운 도전이 주어질 때마다 이런 고민은 계속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번 팀 미팅에서 전하고 싶은 주제는 브랜드란 과연 무엇일까, 또 우리 팀 개개인에게 브랜드라는 것이 매일 하고 있는 일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인상적이게 봤던 인터뷰 영상이 있었습니다. 마티 뉴마이어 (Marty Neumeier)라는 전설적인 그래픽 디자이너가 브랜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명쾌하게 답변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마티는 사람들이 브랜드라고 착각하는 것들에 대해 먼저 이야기합니다. 브랜드 상징 (Brand Identity 혹은 BI)은 사람들이 브랜드를 알아볼 수 있게 하는 유용한 것이지만, 브랜드 자체를 말하지는 않습니다. 제품 그 자체가 브랜드라고 생각하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기업이 소비자에게 약속하는 그 무엇, 혹은 기업이 소비자에게 주고자 하는 인상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는 이런 것들은 브랜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마티는 브랜드가 결과라고 설명합니다. 그가 말하는 결과란, 소비자가 특정 제품, 서비스, 혹은 회사를 생각할 때 드는 개인의 감정입니다. 이 감정은 개인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수십만 혹은 수백만의 소비자가 한 브랜드를 바라볼 때, 또다시 수십만, 수백만의 다른 감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여러 소비자들의 감정이 일반화되면, 시장에서 브랜드에 대한 평판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렇다면 브랜드라는 것은 마케팅이나 디자이너들에게만 국한되는 주제가 될 수 없습니다. 제품 하나가 시장에 나가려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역할을 필요로 합니다. 마케팅과 제품 개발팀이 소비자와 시장에 대해서 분석하여 소비자들이 좋아할 만한 제품 컨셉을 만들면, 제품 개발자들과 엔지니어들은 제품 컨셉을 실제 생산할 수 있도록 설비를 구축하고, 구매팀과 물류팀은 제품 개발에 필요한 부자재를 준비하고 완성된 제품을 공장에서 시장으로 어떻게 보낼지 계획합니다. 디자인과 패키지 팀은 이 제품이 소비자들에게 더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게 제품과 패키지를 준비하고, 다시 마케팅 팀은 이 제품의 장점을 소비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광고와 콘텐츠를 제작합니다. 이 과정 속에서 직원 한 명, 한 명의 노력이 브랜드에 좋은 영향을 미치기도, 또는 나쁜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브랜드는 직급이나 역할에 관계없이 회사의 모든 구성원이 만들어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브랜드가 디자인만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해서, 디자인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하는 디자인이 브랜드의 평판에 영향을 준다라고 생각하면, 또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그 브랜드의 평판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디자인이라는 작업과 결과에 더 큰 책임감을 느끼게 됩니다.
제가 존경하는 선배님 중에 한 분은 브랜드 상징을 디자인하는 회사를 운영하고 계십니다. 앞서 마티 뉴마이어가 브랜드를 결과라고 정의 내렸던 것처럼, 그 선배님은 저에게, 브랜드 상징 디자인은 그릇 같은 것이고 그 그릇 안에 어떤 것이 담길지는 기업이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활동과 역사에 의해 완성된다라고 하는 멋진 말씀을 해 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SAMSUNG이라고 적힌 브랜드 상징 자체는 어떻게 보면 그냥 평범한 글자에 불과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브랜드 상징이 만들어진 이후에 삼성의 대표적인 제품들, 소비자들이 경험한 서비스, 각종 매체에서 보게 되는 이미지들, 그리고 뉴스에서 보게 되는 긍정적이고 또 부정적인 소식들이 합쳐져, 삼성이라는 브랜드 상징을 보았을 때, 단순히 글자라고만 생각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감정을 느끼게 합니다.
다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는 당신을 생각합니다. 그 답을 지금 알면 좋겠지만, 알지 못한다고 해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지금은 앞으로 무엇이 담길지 모르지만 조금은 투박해도 튼튼한 그릇을 준비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그릇이 준비가 되면 용기를 내고 또 엄두를 내서 다양한 경험을 쌓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다양한 경험들이 당신이라는 그릇에 담길 맛있는 음식의 재료가 되어 줄 테니까요. 그리고 그 음식까지 그릇에 담겨 준비가 되면 그때야말로 나는 누구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항상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