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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몽 Jul 29. 2021

중국 최초의 나라 상(商)과
폭군 주왕의 진실

중국고대사

중국 최초의 나라인 상은 어떤 나라인가


상나라의 상(商)은 물건을 파는 사람인 상인(商人), 물건을 파는 가게인 상점(商店). 물건을 파는 행위를 말하는 상업(商業)의 상(商)과 같다. 한자는 하나의 글자가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때의 상(商)은 ‘장사하다’라는 뜻이다. 지금의 관점에서는 이 한자의 무엇이 장사를 떠올리게 하는지 알기 어렵지만, 이는 대략 3,200년 전 한자가 만들어지면서 형태가 너무 많이 정리되었기 때문이다. 상나라 때 사용한 최초의 한자 형태인 갑골문(甲骨文)과 금문(金文)을 통해 고대인들이 ‘장사하다’라는 의미를 글자로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한 사고를 엿볼 수 있다.


아래의 갑골문과 금문에서 탁자 위에 도자기를 놓고 판매하거나, 돗자리 비슷한 것을 깔아두고 호객 행위를 하는 사람의 모습이 연상되는가? 장사를 의미하는 상(商)이 나라의 이름으로 쓰이게 된 것은 상나라의 사람들이 장사를 잘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상나라는 8번 이상 수도를 옮겼는데, 이 과정에서 지역 특산품 등에 대한 정보가 많아져 이를 이용해 장사한 이들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상나라가 망하고 난 뒤 남은 백성은 대부분 노예가 되었지만, 일부는 천하를 떠돌아다니며 먹고 살기 위해 가지고 있던 귀한 물건을 곡식이나 옷가지 등으로 바꾸어 장사를 했다. 즉, 상인(商人)이라는 말은 원래 ‘상나라의 사람’이라는 뜻에서 ‘장사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상나라는 은(殷)나라라는 명칭으로도 불리는데, 후대에서 상나라의 마지막 수도인 은허(殷墟)의 명칭을 따와 부른 것이다. 은허는 중국 허난성(河南省) 안양시 안양현(安陽縣) 북서 일대이다. 

                        


상나라는 기원전 17세기부터 11세기까지 존재한 국가라고 추정하고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상나라는 하(夏)나라의 마지막 왕인 걸왕(桀王)이 애첩 말희(妺喜)에 의해 타락해 폭군이 되자 탕(湯)이라는 성스러운 인물이 혁명을 일으키며 건국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앞에 분명히 또 하나의 나라가 존재했는데도 상나라를 중국 최초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하나라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유적이나 유물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워낙 오래된 나라이다보니 그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부풀려진 나라일 뿐이라고 여겨진다. 같은 이유로 상나라도 원래는 허구의 나라로 치부되어 오다가 1899년 중국 학자 왕의영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한약방에서 사 온 약재 용골(龍骨)에 글씨처럼 보이는 흠집이 있는 것에 의구심을 가지고 연구하면서 비로소 존재가 입증되었다. 이 용골에 있던 것이 바로 상나라 때 사용된 갑골문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은허 유적지가 발견되며 상나라의 존재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따라서 언젠가 하나라도 증거가 나오면 중국 최초의 나라가 바뀔지 모른다. 그러나 현재까지 해석된 갑골문에 딱히 하나라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볼 때 역시 전설 상에만 존재하는 나라거나, 실제 있었어도 아주 작은 부족 국가였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중국 최초의 나라’라고 하면 드넓은 영토를 가진 강대한 제국을 상상하는데, 당시는 아직 지금처럼 넓은 범위의 영토 국가를 제대로 운영할 여력이 되지 않았다. 상나라는 큰 도시국가 수준에 불과했다. 같은 피를 나눈 소수 일족이 모인 원시 부족처럼 작은 수준은 아니지만 고작해봐야 성(城)이나 읍(邑) 수준의 작은 단위가 모여 국가를 이룬 형태로 당연하게도 이런 나라는 상나라만 있는 게 아니었다. 갑골문에는 90여개의 나라 이름이 나온다. 그러나 그중 상나라처럼 강한 나라는 없었다. 상나라는 기원전 12세기 22대 무정(武丁) 왕 때 전성기를 맞이하여 주변 60여개 부족 및 나라들을 복속시키며 유래없이 큰 도시국가 연맹을 이루었다. 당시 기록에 상나라는 ‘대읍(大邑) 상’으로 종종 표기된다. 그러니 이보다 더 앞서 존재했다는 하나라 때는 아마 가장 강했다고 해도 규모가 작은 도시 수준이었을 것이다.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키다


흥미롭게도 상나라는 전해지는 이야기에서 하나라가 망한 형태와 비슷하게 끝을 맞이한다. 상나라의 마지막 왕은 주왕(紂王)으로, 죽은 왕의 행적을 가려 부르는 명칭을 정하는 시호법(諡號法)에서 주(紂)란 의를 해치고 선을 덜어낸 자라는 뜻이다. 주왕은 애첩 달기(妲己)에 의해 타락해 폭군이 된다. 간신을 등용하고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내는 등 잔인무도한 악행을 저지르자, 이를 보다 못한 주(周) 나라의 무왕(武王)이 혁명을 일으킨다는 것이 상나라의 최후다.


주왕의 대표적인 학정으로 주지육림(酒池肉林)이라는 표현이 있다. ‘인공 연못을 파서 술로 가득 채우고, 고기를 나무에 매달아 호화롭게 논다’는 뜻이다. 원래 하나라의 걸왕이 말희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시작했다고 하는데, 상나라에서도 주왕이 달기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다시 재현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두 나라의 끝이 신기할 정도로 비슷할 수 있을까?                         


상의 마지막 왕 주왕


사실 주왕의 이 악행은 후세들에 의해 구전으로 전해진 것으로 당시 주나라 사람들이 사용한 문자인 갑골문에는 딱히 보이지 않는다. 갑골문은 원래 거북의 등껍질인 귀갑(龜甲)에 점을 친 내용이다. 상나라는 제사와 정치가 일치하는, 즉 신앙에 의해 나라를 운영하는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였다. 상나라는 주변 국가들과 전쟁을 거듭할 명분을 신의 신탁에서 찾았기 때문에 점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상나라의 왕은 하늘의 아들로서 그 뜻을 실천하는 대리인인 천자(天子)였다. 상나라 사람들은 제사와 전쟁은 물론이고 며칠 뒤 비가 내릴지, 올해 농사가 어떨지, 감기가 나을지 등 왕실과 귀족의 온갖 일에 다 점을 쳤다. 은허 시기 사람들은 점을 친 갑골문을 한곳에 모아 보관하였는데, 이것이 은허에서 출토된 갑골갱이다. 갑골갱이 1936년 발굴되었을 때 총 1만 7096개의 갑골이 나왔다고 한다. 다른 경로로 유통된 갑골까지 수거해 살펴보았을 때 달기의 이름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는 점에서 과연 주왕에 대한 기록이 사실일지, 왜 하필 두 나라 다 여자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건지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단순히 여자라서 갑골문에 기록이 없다고 보기에는 무정왕은 사랑하는 왕비 부호(婦好)를 위해 임신, 출산, 질병의 치유 여부 등을 반복해 점쳤다.


주왕의 원래 이름은 제신(帝辛)으로, 현재까지 밝혀진 갑골문의 기록에 의하면 유능한 정복군주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 제을(帝乙) 대부터 숙원이었던 동쪽 영토 확장을 목표로 동이족을 정벌하는데 힘을 썼다. 주지육림과 함께 주왕의 악행을 표현하는 말로 ‘불에 굽고 지지는 형벌’이란 뜻의 포락지형(炮烙之刑)이 또 사용된다. 기름 바른 구리기둥을 불로 달군 뒤 죄인들에게 기어가도록 시켰다고 한다. 주왕과 달기는 이렇게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박수를 치며 웃었다고 하는데, 갑골문에는 포락지형의 이야기는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주왕이 나름대로 사람을 귀하게 생각한 면모가 드러난다. 사실 은나라는 정벌을 통해 잡아온 노예나 죄인 등을 신에게 바치는 인신공양 풍속이 흔한 나라였다.     


3백 명의 강인(羌人)을 정(丁) 제사에 사용할까요? 三百羌用于丁 - 갑골문합집 295편

경오일에 점칩니다. 유(侑) 제사에 노예 30명을 써서 대을(大乙 ; 탕 임금)님께 올릴까요? 庚午卜, 侑奚大乙三十 - 갑골문합집 – 19,773편

계축일에 점을 칩니다. 각(殼)이 여쭤봅니다. 5백 명의 복인(僕人)을 쓸까요? 10일이 지나 임신일에 또 백 명을 썼다. 삼월이었다. 癸丑卜, 殼, 貞五百僕用. 旬壬申又用僕百, 三月. - 갑골문합집 559‧562편     


이 과정은 대단히 잔인했는데, 반항심을 품은 세력들에게 공포를 주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람이나 동물을 함정에 빠뜨려 생매장을 하는 매제(埋祭), 사람을 불태우는 요제(燎祭) 등 다양한 인신공양 제사 방법이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왕인 주왕 대에 이르러서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일이 최소로 줄어들고 대신 짐승을 주로 사용했다. 그의 악행을 증명해주는 실질적인 증거가 없다는 것까지 포함해 볼 때 그가 정말 무능하고 악독한 폭군이라고 우리가 확신할 수 있을까? 주나라가 반역했을 때 명분 중 하나가 “주왕은 상제를 공경하지 않아 제사를 소홀히 지냈다”인 것과 주왕이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일을 줄인 것은 상관이 없을까?


현재 해석한 갑골문을 볼 때 상나라가 망한 것은 폭정이라기보다는 주왕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동쪽 정벌에 힘쓰는 동안 서쪽 방비가 약해진 결과로 보인다. 동쪽 동이족 정벌을 위해 상나라가 주력 군대를 동쪽으로 보내버린 사이, 상나라의 하위 연맹국 중 서쪽의 가장 큰 나라인 서기(西岐) 땅의 희발(姬發)이 기습적으로 일으킨 반란에 상나라가 대응하지 못하고 무너진 것이다. 이 서기가 바로 주나라로, 희발은 무력(武:무예 무)으로 정벌한 왕이라고 해서 무왕(武王)이라고 한다.


주왕 본인의 행실이 실제로는 어땠을지 모르겠으나 상나라는 앞서 보았다시피 오랜 세월 거듭한 영토 확장 목적의 전쟁과 잔인한 인신공양의 풍속으로 수많은 민족 및 국가들의 원한을 샀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의하면 주나라의 동맹국이 줄을 이어 40만 대군을 이루었고 마침내 목야(牧野)에서 상나라의 70만 대군과 대전을 벌였다고 한다. 그러나 상나라의 군대는 숫자만 많았을 뿐, 정예병이 모조리 동쪽에 가 있어 노예로 겨우 채운 숫자였기 때문에 끝내 패배하며 천하의 주인은 주나라로 바뀌었다. 사마천이 600년 뒤에야 작성한 것을 볼 때 군사의 숫자는 과장이 있었을 것이나, 과정은 비슷했던 것 같다. 무왕이 동맹국을 이끌고 상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갈 때 고죽국(孤竹國)의 왕자 백이(伯夷)와 숙제(叔弟)가 “신하로서 군주를 시해하는 것이 인(仁)한 것 같습니까?”라고 말렸다고 하는데, 당시 사람들도 주나라가 상나라의 주왕을 치는 명분을 완전히 납득하지 못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아마도 주왕에게 붙은 애첩에게 홀린 폭군의 이미지는 부족한 명분으로 상나라를 친 주나라에서 반역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 퍼뜨린 악소문일 것이다. 인신공양의 문제에서 상나라가 가장 힘이 강했기에 지독했을 뿐, 주나라에서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신공양의 일종으로 높은 지위 사람이 죽을 때 사후 세계에서 모시기 위해 하위 계급 사람을 죽이는 순장은 주나라가 망할 때까지 거의 계속 된다. 애초에 고대는 지금처럼 사람이 타고날 때부터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가진다는 인권의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관점으로 당시를 평가하는 건 무리가 있다. 주지육림도 허풍이구나 아니면 당시의 잔혹한 제사 풍습을 과장해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춘추시대 공자의 제자 자공은 주왕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주왕의 선하지 않음이 그와 같이 심하진 않았을 거다. 이 때문에 군자는 낮은 하류에 거하는 걸 싫어하니, 천하의 악이 다 그에게 모이기 때문이다.(논어 19편 자장 20장)”


이에 관해 조선 후기 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한 번 악명을 얻으면 사람들이 그의 행적을 부풀리다 못해 새로운 거짓을 추가하고, 시간이 지나버리면 아예 모두가 이를 믿어 사실이 되어버리는 것이라고 부연 설명했다. 전국시대 순자도 비슷한 말을 한 것으로 볼 때, 그 옛날 사람들도 주왕에 대한 일화는 지나치게 부풀려졌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출처>

신영자, <갑골문의 비밀>, 문 2011

김경일, <유교 탄생의 비밀 갑골문.청동문.죽간으로 밝혀낸>, 바다출판사 2013

紂王之紂是何意思,甲骨文揭開謎團,紂之諡號本非蔑稱?https://www.gushiciku.cn/dl/12UXi/zh-t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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