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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몽 Dec 12. 2021

버림받은 사람의 고통, 허난설헌의 강남곡

한시의 해설

조선의 천재 여류시인, 허난설헌은 어떻게 태어났는가?


허난설헌 표준영정(보물)


조선시대에 이르러 심화된 남성 중심 문화로 인해 여성의 교육이 제한되어, 우리나라의 여류 시인은 기생을 제외하고는 몇 없다. 그 몇 안 되는 여류시인 허난설헌, 곧 허초희는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누나로 임진왜란 발발 직전 조선 중기 사회에 태어났다. 우리에게 덜 알려져 있을 뿐 오라비인 허성, 허봉에 아버지인 허엽까지 허씨 집안은 모두 문학의 재능이 뛰어나 초당오문장(楚堂五文章)이라고 불렸다. 비록 문학의 재능에 비해 학문의 깊이나 철학적인 통찰은 다소 부족한 점이 안타깝다고 평가받았지만.


허씨 집안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익히 잘 알려진 허균은 오만하고 불손한 언행으로 당시 적을 많이 사 결국 역모죄로 처형을 당했다. 아마 허균의 타고난 성정이나 막내로 태어나 사랑받던 환경 탓도 있겠지만, 당시 허씨 집안은 성리학의 영향으로 경직되어가던 분위기의 조선 사회에서 가풍이 개방적인 편이었기에 그런 영향도 받지 않았나 싶다.


조선 중기는 딸의 이름은 짓지 않기도 하고, 글공부를 가르치지 않는 것이 당연시되던 사회였다. 그럼에도 허씨 일가는 딸 난설헌의 재능을 높이 사, 당시 조선에서 3대 시인이라고 평가받던 이달을 한시 과외 선생님으로 붙여줄 정도로 신경 썼다. 난설헌이 오빠와 동생의 공부를 곁에서 바라보다가 스스로 시를 지을 정도로 천재였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8살 때 쓴 「백옥루 상량문」은 조선 사회를 한동안 떠들썩하게 만들 정도였다. 아무런 제한도 없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하던 이때는 그녀의 생애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8살 때 쓴 「백옥루 상량문」




비극적인 생애    


자유분방한 집안에서 자랐던 난설헌은 15살 때 과거시험 대과(최종시험) 급제자를 5대째 배출한 안동김씨 명문가의 김성립에게로 시집을 갔다. 오라비인 허봉이 김성립의 아버지인 김첨과 함께 공부했던 사이였기에 중매를 섰던 것인데, 이것이 바로 그녀를 비극으로 몰았다. 남편은 그녀에게는 맞지 않는 수준의 남자였다. 허균은 「성옹지소록」에서 매형에 대해서 이렇게 비꼬았다.
 

“세상에 문리(文理)는 부족하면서도 글은 잘 짓는 이가 있다. 나의 매부 김성립(金誠立)은 경서ㆍ사서를 읽으라면 입도 떼지 못하지만 과거 시험 글은 요점을 정확히 맞추어 여러 번 높은 등수에 들었다.”

    

김성립과 난설헌은 불화가 심했다. 김성립은 학문적 지시은 없으면서도 글은 기교적으로 잘 썼던 모양이지만 결과적으로 과거 시험은 결혼하고 12년 뒤, 난설헌이 사망하던 해에 합격했다. 합격권에서 탈락하기를 반복했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난설헌도 남편을 연모하던 시를 지었던 것을 보아 부부의 사이는 괜찮았던 모양이지만, 지속된 김성립의 과거 시험 낙방과 그 와중에도 세간에서 칭찬이 자자한 아내의 재능에 김성립이 열등감을 품으며 부부 사이가 벌어졌다.


남편은 난설헌을 박대하고 기생집을 즐겨 찾으며 주색잡기에 힘썼다. 난설헌의 재능을 적극 후원한 친정 분위기와 달리 김성립의 집안은 여성의 역할을 살림으로 엄격하고 제한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감히 여자로서 시를 짓는 난설헌은 시부모에게도 남편의 기를 꺾는다고 구박받기 일수였다. 설상가상으로 가정사의 비극이 더해지기 시작했다.


난설헌의 친정은 처참하게 몰락했다. 아버지인 허엽은 난설헌이 18살 때 객사했고, 21살 때 오라비인 허봉도 율곡 이이를 탄핵했다가 귀양 갔다. 20살이 되었을 때 어린 딸과 아들을 해를 두고 연이어 잃었고, 그 충격으로 임신 중이던 셋째도 만삭이 다 되어 유산했다. 시댁의 대접이 더 박해졌을 것은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난설헌과 두 아이의 무덤(우리문화신문, 양승국, 2018.06.25.) 무덤 앞에는 오라비인 허봉이 아이들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쓴 글이 있다.


오라비인 허봉마저 26살에 객사한 다음 해, 난설헌은 27세의 짧은 나이로 사망했다. 시로 인해 남편과 시댁에 박대를 받아도 난설헌은 그녀의 토로한 마음을 시로 계속 풀어내었다. 그러나 결국은 자신이 겪은 비극의 근본 원인이 시라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유언으로 자신이 여태 지은 시를 모두 불태우라고 말했다. 허균은 누나의 시를 불태우던 중 비통한 마음이 들어 중단했다. 누나의 흔적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슬퍼 남아있는 시와 불태운 시에서 자신이 외운 것들을 기록해 시집으로 만들어 중국 사신에게 전했다.     


허균이 역적으로 몰리면서 조선에서는 가족인 난설헌의 시집까지 모두 사라졌지만 중국에서는 대유행을 했다. 난설헌의 시집은 중국에서 큰 인기를 얻어 그녀의 시집을 만드느라 중국의 종이값이 올라 큰일이라는 한탄이 나올 정도였으며, 일본으로까지 퍼졌다가 역수입으로 조선에서 다시 퍼졌다.




버림받은 여성만이 볼 수 있는 고통, 강남곡     

난설헌이 지은   ‘강남곡 있다. ‘강남의 노래라는 뜻인데, 여기서의 ‘강남 우리나라의 ‘강남 아니다. 우리나라 속담 중에 ‘친구 따라 강남 간다라는 말이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강남땅은 ‘강남 스타일이라는 세계적으로 히트친 노래의 배경이  정도로 놀기 좋은 곳이지만, 과거에는 침수가 잦은 비인기지역이었다.     


시의 배경 장소인 ‘강남’은 중국 소주 땅의 지역으로, 날씨가 좋고 보고 들을 것도 많아 꼭 한 번 사람들이 가보기를 꿈꾸는 유명한 관광지였다. 강남 지역이 워낙 낭만적인 여행지로 유명하다 보니 옛날부터 한자문화권에는 강남을 상상해서 ‘강남곡’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는 문화가 있었다. 제목에 시를 의미하는 시(詩)가 아니라 노래를 의미하는 곡(曲)이 붙은 이유는 원래 노래에서 유래를 했기 때문이었다.


소주 4대 정원 중 하나인 사자림


대체로 강남곡은 연인 간의 사랑 노래나 즐거운 풍물 등 낭만적인 분위기로 지어진다. 그러나 난설헌의 강남곡이 유명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강남에 숨어 있는 비극미를 찾아 서술했다. 그녀의 시 강남곡은 다음과 같다.



江南曲(강남곡) ; 강남의 노래

인언강남락(人言江南樂)이나  ;  다른 사람들은 강남의 즐거움을 말하나
아견강남수(我見江南愁)라     ;  나는 강남의 근심을 보네
연년사포구(年年沙浦口)에     ;  해마다 모래 가득한 포구에서
장단망귀주(腸斷望歸舟)라     ;  창자가 끊어지며 돌아오는 배를 바라보네     


강남곡을 해석해보면 도대체 왜 유명한지 이해할 수 없다. 강남의 근심이 뭔지, 왜 창자가 끊어진다는 건지 불친절하기 짝이 없는 시이다. 이 시를 제대로 이해하고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우선 한시의 특징을 이해해야 한다.


한문으로 지어진 시를 의미하는 한시는 처음에는 아무 제한도 없이 지어졌다가 후대에는 규칙이 매우 엄격해졌다. 한자는 하나의 글자가 여러 가지 뜻과 발음을 가지고 있어 극도로 함축성이 높은 언어이다. 이러한 한자의 특성을 활용해 한시는 예술성을 높여 자랑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글자 수와 구절 수의 제약을 두었다. 이런 시의 특성 때문에 전통적으로 동양에서는 마음을 제한 없이 풀어내는 산문보다 제한 속에서 에둘러 표현하는 시의 문학성을 더 높이 쳤다.


가장 후대에 지어진 시를 근체시라고 부르는데 근체시는 5글자와 7글자, 그리고 또한 4구절과 8구절로 나누어져 있다. 난설헌은 5글자와 4구절을 선택해 지었는데(오언절구) 한시 중 가장 짓기 어려운 형식이다. 왜냐하면 시의 특성인 운율감을 만들기 위한 또 다른 규칙 등이 엄격하게 적용되기 때문이었다. 20글자로 단순히 발음만을 맞추는 게 아니라 한자의 뜻까지 고려하며, 동시에 작가가 하고 싶은 시의 주제까지 이야기해야만 하니 여간 짓기 쉬운 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상상력이 가미되어 작품성이 올라간다.




첫 번째 구절, '인언강남락(人言江南樂)이나
                   ; 다른 사람들은 강남의 즐거움을 말하나'


"중국 소주 강남땅 정말 즐겁고 재미있는 일이 많은 곳이지"라고 사람들이 말한다. 얼핏 보면 평범한 구절이지만, 이 말을 할만한 사람들을 생각해보아야만 한다. 흔히 '다른 사람들'이라고 하면 남녀노소를 통합한 것으로 보지만, 이때는 성별 차별이 엄격한 옛날이다. 그리고 과거 재미있는 풍물지에 여행이 허락되는 사람들은 오직 남자들 뿐이다. 즉 이 시에서 말하는 '다른 사람들'은 바로 뭇 남성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두 번째 구절, '아견강남수(我見江南愁)라

                                       ; 나는 강남의 근심을 보네


첫 번째 구절의 주체가 남성들이라는 것을 보면 두 번째 구절에서 왜 '나'의 존재가 강조되는지 알 수 있다. 이 시의 작가는 여자이다. 남자들은 강남땅이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지를 말하지만 여자인 나는 그 땅의 근심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보는 근심은 무엇인가? 왜 남자의 즐거움과 여자의 근심이 대비되는 걸까?     

산문이라면 이 설명을 자세히 해줘야만 하지만, 난설헌이 짓고 있는 오언절구는 계속 반복하다시피 글자 수 제한이 심각하다. 고작 10글자 밖에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제 사용할 수 있는 글자는 10글자 밖에 남지 않아 결말을 지어야만 한다. 한시의 이런 제약이 많은 특성 때문에 작가는 원하는 대로 시의 주제와 감상을 이끌어내기 위해 소위 기승전결(起承轉結)이라는 4단계 구성을 촘촘히 짠다.


오언절구 시는 첫 번째 구절에서 시의 주제를 꺼내고(起 : 일어날 기), 두 번째 구절에서는 그 주제를 이어받아 확장하면서 조금 더 하고 싶은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꺼낸다(承 : 이어받을 승). 세 번째 구절부터는 결말을 준비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친 설명으로 감동을 떨어뜨리지 않아야 한다. 작가는 흥미와 상상력을 일으키는 이야기로 분위기를 전환시키며(轉 : 전환할 전), 마침내 네 번째 구절에서 적절한 끝을 맺어 원하는 주제를 도출한다(結 : 맺을 결).     


이러한 전개 과정이 얼마나 뛰어나며 깊은 여운을 주느냐에 따라 작가의 예술적 성취가 돋보인다. 여기서 난설헌이 본격적인 주제로 전환시키는 솜씨는 기가 막히면서 동시에 배경지식과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세 번째 구절, '연년사포구(年年沙浦口)에 ;

                                     해마다 모래 가득한 포구에서'   


먼저 옛날 고전 작품에서 암묵적으로 약속이 되는 것이 있다. 배가 드나드는 옛날 항구인 '포구'란 언급만으로 이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공간이다. 오늘날은 공항이든 항구이든 대수롭지 않게 사람을 배웅한다. 탑승물의 안전성이 과학을 통해 보장되기 때문에 그다지 걱정거리가 아니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조선후기 이인문의 강산무진도 속 강변 포구의 모습


가장 대표적인 이동 수단인 배는 당시 열화된 기술로 인해 조악한 배와 예측 불가능한 바다의 사정 때문에 항상 영원한 이별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공간이었다. 또한 그 남녀차별이 엄격한 시대에 배를 탈 만한 사람들은 남자일까 여자일까? 떠난 사람이 있다면 기다리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난설헌은 ‘포구’를 언급시킴으로써 자연스럽게 헤어짐과 또한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여성들을 등장시킨다. 또한 이는 ‘해마다’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다는 것도 이야기한다. 딱 5글자로.




마지막 구절, '장단망귀주(腸斷望歸舟)라 ;

                         창자가 끊어지며 돌아오는 배 바라보네'


세 번째 구절에서 이별을 슬퍼하는 여성들과 장소인 포구가 제시되었다. 이 마지막 구절에도 배경지식을 필요로 하는 단어가 있다. 시에서 사용한 장단(腸斷)은 흔히 단장(斷腸)이라고 부르는 표현으로, 난설헌은 운율감을 살리기 위해 고의적으로 글자를 바꾸었다. 단장은 창자가 끊어진다는 뜻으로 지독한 슬픔을 상징한다. 우리 트로트 중에 6.25로 인해 피난 가던 사람들의 고통을 다룬 ‘단장의 미아리 고개’라는 노래가 있는데, 바로 이때의 단장이다.


이해연, ‘단장의 미아리 고개’ 커버. 처절할 정도로 고통스럽고 슬픈 감정이 묘사되어 있다.


옛날 동진(東晉)의 원정군에 속해 있던 병사가 사지로 가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원숭이 새끼를 납치했다고 한다. 이때 어미 원숭이가 미친 듯이 쫓아왔는데 병사는 무시하고 배를 타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어미 원숭이는 새끼를 포기하지 않고 멀리 보이는 배를 쫓으며 육지를 내달렸다. 마침내 배가 육지에 당도했을 때 어미 원숭이가 배로 뛰어들었는데 그 순간 지쳐 죽고 말았다고 한다. 그 배가 보통 원숭이와 다르게 울퉁불퉁 이상해 사람들이 갈라보니 창자가 조각조각 끊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창자가 끊어진다는 표현은 지독한 슬픔을 대표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사람 창자의 구성. 지금도 사람이 지치면 탈장이 일어나는데, 이게 마디마디 다 끊어질 정도면 얼마나 심한 걸까?


이에 따라 마지막 구절은 ‘창자가 끊어질 듯 슬퍼하며 돌아오는 배 바라보네’로 봐야 한다. 정말로 창자가 끊어졌다는 게 아니라, 그 정도로 고통을 받고 있다는 말이다.




강남곡이란 시가 말하고 싶은 것     


이제 모든 시의 내용을 정리한다. 남성들은 강남땅이 놀기 좋다고 상상하며 즐거워하지만, 여성인 난설헌은 그 말을 들으며 그 속의 슬픔을 유추해본다. 강남땅에 놀러 간 남성들은 쉽게 갈 만한 땅이 아니니 몇 달은 체류했을 것이고, 그러면서 그곳의 아가씨들과 연애를 하고 어쩌면 미래를 약속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첫 번째 구절에서 사람들, 곧 남성들이 말하는 강남의 즐거움이다.


허나 지금도 그렇듯 결혼이란 인륜지대사. 안타깝지만 과거에는 더욱 남녀의 감정에 따라 결혼이 추진되는 게 아니라 집안에 달려 있었다. 돌아갈 때가 된 남성들은 여자와 이별을 하든, 아니면 반드시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을 것이다. 순정을 여성의 미덕으로 철저히 교육받던 시대니 버림받은 여성은 그래도 남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을 것이고, 결혼을 약속받은 여성들은 더욱 애타하며 기다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세 번째 구절에서 '해마다', 네 번째 구절에서 '창자가 끊어질 듯 슬퍼하며 돌아오는 배를 바라본다'라고 했다. 그렇다, 아무리 여자가 기다려도 그 남성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옛날 위험한 뱃길에서 사망했을 수도 있고, 부모가 반대해 다른 여자와 결혼했을 수도 있다. 눈에서 보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그냥 결혼하고자 하는 마음이 식어버렸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먼 강남땅에 이별을 고하는 편지라도 보내야 했을 텐데 그 심부름꾼은 무사히 강남땅까지 올 수 있을까? 직접적으로 이별을 말하는 나쁜 사람이 되기보다는 조용히 회피해버리고자 하는 이들은 없었을까?


창자가 슬퍼하며 애인이 돌아오기를 바라보는 여인


떠난 남성을 그리워하며 여성들은 매번 들어오는 배에 내 님이 타 있을까 애타한다. 이번에 온 배에도 소식이 없음에 슬퍼하며, 해가 바뀌어도 포기하지 못하고 포구로 달려간다. 유흥을 즐기는 남성들은 생각도 못 할, 버림받은 여성들의 고통. 이것이 바로 두 번째 구절에서 말하던 여성인 나이기에 주목하고 볼 수 있는 강남의 근심이다.     


쉽게 정리한 강남곡의 시상 전개방식




강남곡의 숨어있는 주제, 난설헌의 고통.     


이렇게 ‘강남곡’ 시를 보며 ‘버림받은 여성들의 슬픔과 고통’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이 시의 감상은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어째서 난설헌은 하필이면 즐거운 소재에서 버림받은 여성의 고통을 살피게 되었을까? 여기서 다시 그녀의 생애를 떠올려보자. 남편 김성립은 아내를 멀리하고 기생집을 전전했다. 아내인 난설헌은 언제나 남편을 그리워하고 원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 난설헌은 그런 자신의 슬픈 처지를 바로 강남의 여자들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회 주류층인 남성들은 도외시하는 여성들의 슬픔. 이 시를 읽고 시구를 곱씹어본 당시 남자들은 여성들을 버린 남성들을 탓했을 것이다. 거기서 더 생각이 뻗어난 이들은 자신들이 향락에 빠져 도외시하고 있던 부인들을 생각하며 신음했으리라. 남편 김성립은 부인의 슬픔이 곧 자신에 대한 비난이라고 생각해 얼굴을 붉혔을 지도 모른다. 남편의 지나친 외도로 고통받던 그녀였기에 가능한 시각적인 전환이었다. 시가 끝나도 말 없는 비판이 담겨 있기에 더 훌륭한 시다.

     

난설헌은 "작은 조선 땅에서 태어나, 남성으로 태어나지 못하고,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이 한이다"라고 했다. 그녀가 남성이었다면 과거 시험도 꿈꿀 수 있었을 것이다. 남편보다도 능력이 뛰어났음에도 여성이라는 한계 때문에 억압된 채 살 수 밖에 없었던 그녀의 한이 느껴지는 말이다.      


여담이지만, 남편 김성립은 난설헌이 죽은 해 과거 시험에 합격한 뒤 곧바로 재혼해 버린다. 난설헌의 죽음과 재혼이 같은 해에 이루어진 것이다. 12년을 같이 산 아내에 대한 애도의 감정도 별반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그는 죽고 난 뒤 첫 번째 아내가 아니라 두 번째 아내와 같이 묻히기까지 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보면 김성립은 정말 나쁜 남자인 듯 보인다. 그런데 한가지 모순되는 점이 있다. 과거 시험에 합격한 지 3년 만에 임진왜란이 터지자 그는 의병장이 되어 필사적으로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시신조차 찾지 못해 의복을 가지고 장사지내고, 아들이 없어 후손을 입양했다고 한다. 당시에 의기로 분기탱천한 뜻있는 선비도 가부장제와 남녀차별의 사회적 한계를 어쩌지 못했다는 점에 탄식하게 한다.     


이상 난설헌의 재능과 그녀의 삶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사실 난설헌의 시는 중국 시들과 유사점이 많다. 소위 표절이 잦다는 건데, 이 때문에 천재라고 불리기에는 지나치지 않느냐고 비판받는다. 허균이 시를 불태웠다가 암기한 것을 기록했기 때문에 고평가 받는 작품도 그녀의 것이 아니라 허균의 창작이라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 후자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전자는 조금 변명의 거리가 있다. 당시 조선 사회는 당나라의 시를 모방해 최고로 비슷하게 짓는 것을 높게 쳤다. 새로운 표현을 쓰면 과거에 없던 표현이라고 맹비난했기 때문에 표절의 문제는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흐름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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