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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우 Jul 14. 2021

만년필을 사고 싶은 이들에게

만년필 입문자를 위한 만년필 선택 요령

만년필을 추천해달라는 요청을 왕왕 받는다. 그럴 때마다 만년필 여행작가라는 사회적 위신에 걸맞게 의뢰인의 관상과 손금, 혈액형과 피부타입, 정치 성향과 평소 행실 등을 골고루 따져 꼭 맞춤한 만년필을 추천한다...는 건 당연히 뻥이고, 이것저것 묻는 시늉을 하고 고민(이때, 책상을 검지로 툭툭 두드리며 어디보자...라는 대사와 함께 마치 구름 뒤에서 만년필이 튀어나오기라도 할것처럼 창공을 응시)하는 척 한 다음 질문과 상관없이 "라미 사, 라미" 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어차피 내게 물었으니 내 맘이라는 심정으로 답했다.


한데 그 결과, 라미 만년필이 햄스터처럼 주변에 번식하여 급기야 지인 중에 라미를 한 자루씩 가지지 않은 자가 없는바, 언제부턴가 "라미 말고 다른 건 없어?"라는 질문을 심심찮게 받기에 이르렀다(보고 있습니까, 라미 마케터님? 뭐 그렇다고요) 그래서 이제 슬슬 진실을 말할 때가 되었다는 심정으로 글을 쓴다.

 

결론부터 당기면 어떤 브랜드의 어떤 모델을 살 것인가 하는 고민은 만년필 선택의 상수가 될 수 없다. 그럼 무엇이!? 요승 같은 조언이긴 하지만 만년필 선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다. 그럴듯해 보이려는 허풍도 아니고 귀찮(기는 여전히 조금 귀찮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귀찮)아서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도 아니다. 만년필이 책상 위 숱한 필기구 중 필기 자세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도구라는 사실을 먼저 기억할 필요가 있다.


평소 필압(글 쓸 때 누르는 정도)과 필기 자세는 어떠한 지 세척을 게을리 하지 않을 정도로 꾸준한 성정의 소유자인지 만년필은 다 알고 있다. 오랜 세월 써 온 누군가의 만년필이 주인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손에서 잘 씌어지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만년필이 원래 주인의 필압과 필기자세에 따라 마모됐기 때문이다. 중고 만년필을 산 이들은 이런 현상을 두고 '주인 못 잊었다'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 만년필 고를 때 나를 알아야 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필압이다. 내 필압은 만년필 선택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한국 남성의 평균 필압은 140g/㎠이다. 여성은 이보다 조금 낮은 110g/㎠ 정도. 그래서 대부분의 만년필 브랜드는 120g/㎠ 정도의 필압에 맞춰 제품을 생산한다. 남녀 차가 아니어도 평소 세워 쓰는 습관이 있다면 필압이 높을 가능성이 크다. 연필이나 볼펜을 꾹꾹 눌러쓰는 이들 역시 필압이 높다. 이런 이들은 경성닙 즉, 단단한 촉의 제품을 구매해야 한다. 초심자의 경우, 자신의 평소 필압을 잘 모르고 대부분 필압이 높으므로 경성닙의 정석이라 불리는 라미를 권하는 게 내 입장에선 아주 허튼 추천이 아니란 거다(에헴) 


두 번째 중요한 기준은 필기 각도. 말 그대로 필기구를 손에 쥐었을 때 마찰 면과 만년필 사이의 각을 뜻한다. 필기 각도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인데 한국인의 경우 대략 50~80도 사이에서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대부분 만년필 제조사가 평균 각도 60도에 맞춰 제작한다. 흔히 '촉'이라 불리는 만년필의 닙 끝엔 부식에 강한 플레티늄이란 합금이 쓰이는데 이게 출시될 땐 갈라지는 끝자락에 5:5의 비율로 균형 있게 제조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주인의 필기 각도에 따라 한쪽의 마모 정도가 달라진다(플레티늄 금속은 상당히 비싼 물질이다) 누군가 오랜 시간 꾸준히 사용해 온 만년필이 타인의 손에서 잘 작동하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참고로 닙에 가깝게 잡을수록 필기 각도가 크고 닙에서 손가락이 멀어질수록 필기 각도는 좁아진다.


끝으로 중요한 요소는 활자 꼴이다. 자신의 활자가 가는지 굵은지도 중요하다. 가장 가는 필기가 가능한 UEF 닙의 경우, 활자 꼴이 가는 만큼 한번 충전으로 2만3천 자 가량 쓸 수 있지만 가늘게 나와야 하는 특성 때문에 상대적으로 필기감이 굵은 닙(B닙)에 비해 필기감이 부드럽지 않은 단점이 있다. 필압을 견디면서 가늘게 만들려면 경성으로 제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굵은 글씨로 필기가 가능한 M닙 이상의 경우 필기감이 좋지만, 상대적으로 잉크를 자주 충전해야 한다. 최근 일본 플래티넘 같은 브랜드는 가늘게 씌면서도 연성의 부드러운 필기감을 제공한다(역시, 보고 있나요 플래티넘 마케터님?) 세필을 선호한다면 볼 것도 없이 일본 제품을 사는 것이 좋다.


만년필을 고를 때 '나 자신'이 중요한 이유는 이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크게는 필압, 각도, 활자 꼴로 정리 할 수 있다. 유난스럽게 들릴지 모르지만 만년필은 왼손잡이용이나 악보용이 따로 존재할 만큼 사용자가 우선인 필기구다 (왼손잡이용 볼펜이나 연필을 들어보셨는가?) "나를 기억하는 유일한 친구" "나만 따르는 책상 위의 충견(忠犬)"이란 만년필에 대한 유비가 애호가들의 호들갑일 수는 있겠지만 결코 거짓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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