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녹스크롬 inoxcrom 만년필
여행을 많이 다녔지만 유명 관광지를 자주 방문하는 편은 아니다. 가령 얼마 전 다녀온 스페인 여행에서도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부러 가보지 않았다.
내 여행은 다르다고 유난을 떨고 싶은 게 아니다. 모든 여행은 다르고 각자 놓치고 싶지 않은 공간이 제 나름으로 존재한다는 이야길 하고 싶은 거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런 곳이 바로 문방구다. 정보화시대라는 단어마저 고색창연하게 여겨지는 세상이지만 나는 여전히 손으로 쓰는 도구에 대한 집착이 심하다. 이런 내가 기왕에 방문한 스페인에서 원했던 건 스페인 만년필 이녹스크롬이었다. 미국 독일 같은 유명 만년필 제조국보다야 수고가 더 들긴 하겠지만 온 세계가 손금처럼 연결된 마당에 사실 스페인 만년필이라고 구하지 못할 건 없다. 하지만 물건 자체보다 물건에 깃든 이야기가 중요한 사람이다. 클릭 몇 번으로 아마존이나 이베이를 통해 원하는 제품을 구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날아온 만년필을 앞에 두고 무슨 이야길 할 수 있나.
그런 생각에 이르면 장바구니에 담긴 제품은 끝내 결제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대단한 한정판을 찾아 부지런을 떠는 위인도 못 된다. 희소의 가치만으로 매겨진 터무니없는 가격의 한정판을 한때는 특별하다 여기기도 했지만 이제는 한정판이 특별한 게 아니라 돈이 특별할 뿐임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한정판은 말 그대로 나의 이야기로 한정될 때라야 비로소 특별해진다는 사실도.
바르셀로나 해양박물관 앞에선 매주 일요일 벼룩시장이 열린다. 해안을 면하고 있어 갯내가 풍기는 벼룩시장은 펼쳐진 풍광만으로 이미 흥미롭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중 중년의 판매자가 무료하게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좌판에서 이녹스크롬 만년필을 발견했다. 좌판에는 이녹스 크롬 외에 독일 만년필 펠리컨도 나란히 누워있었다. 판매자는 두 중고 만년필 사이에서 고민하며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는 내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이녹스크롬은 닙이 파묻힌 '인셉닙'형태였고 펠리컨은 전형적인 일반적 모형의 '오픈닙'형태였다.
나는 결국 이녹스크롬의 값을 치렀다. 5유로.
사실 둘 다 구입해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나는 끝내 펠리칸 만년필을 남겨두었다. 그간 여행을 통해 깨달은 게 있다. 여행엔 모두 보고 즐겼다는 포만감보다 못내 돌아서는 아쉬움이 더 귀하다는 사실이다. 그건 맛있는 음식에 대한 예의와도 비슷하다. 구입한 만년필은 돌아온 이후 여행지를 계속 그립게 만들고 바르셀로나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작은 이유가 되기도 할 것이다.
물론 다시 내가 포기한 만년필을 만날 순 없을 것이다. 판매자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고 이미 눈썰미 좋은 다른 콜렉터의 수중에 들어갔을 공산도 크다.
내가 바르셀로나를 다시 갈 수 있을지도 알 수 없기 마찬가지다. 하지만 내가 지금 이녹스크롬만년필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듯 내가 두고 온 만년필은 또 누군가의 이야기가 되어 줄 것이다. 그건 그거대로 좋은 일이다.
이야기에 이야기를 덧대는 일. 그게 벼룩시장의 매력 아니던가. 우리 부부는 만년필과 더불어 고딕성당 문양이 섭새김 된 손거울과 스페인 범선을 본뜬 편지 칼도 함께 샀다. 자주 쓸모가 닿는 물건들은 아니겠지만 이 물건을 볼 때마다 우리 부부는 바르셀로나를 이야기할지 모른다.
그게 바르셀로나에서 팔자에도 없는 서울 어느 부부의 아파트까지 건너와야 했던 벼룩시장 만년필의 보람일 것이다. 결코 만날 일 없는 것들이 만나면서 생겨나는 소란, 여행이란 게 원래 다 그런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