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미 사파리 2016 스페셜 에디션다크라일락
만년필이 필요한 여러 상황이 존재하지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일기 쓸 때와 책 읽을 때다.
만년필 제조사들이 홍보용으로 사용하는 사진과 달리 일반인이 양국 외교문서에 만년필로 서명하는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으니까.
그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만년필로 밑줄 긋기'다. 밑줄을 긋고 나면 비로소 내 것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달까.
그래서 내 책에는 밑줄과 메모가 많다. 뒤이어 같은 책을 읽은 처는 늘 읽는데 방해가 된다고 지청구를 주지만 , 독서란 게 활자를 읽는 게 아니라 저자와 대화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나로선 쉬이 고쳐지지 않는 버릇이다
좋은 물건을 보면 갖고 싶은 마음이야 인지상정이지만 다른 만년필 애호가에 비해 사재기 수준으로 모으진 못 한다. 라미 사파리 한 종류만 해도 그 색깔을 다 모으는 건 부담스러울 만큼 많다. 그래서 수집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다.
헌데 보라색만 보면 사족을 못 쓰는 내게 라미의 다크라일락 에디션은 각별했다.
비싸거나 귀해서는 아니었다. 내 만년필 수집함엔 라미보다 비싼 만년필이 많다.
아니다. 대부분의 만년필이 이 녀석보다 비싸다. 귀하지도 않다. 매년 발행되는 라미 사파리의 스페셜컬러가 상술임을 모르는 사람은 이제 없다.
그래도 이 녀석이 꼭 갖고 싶었다.
안다. 이제 내겐 평생을 써도 다 쓰지 못할 만년필과 잉크가 있다는 걸.
하지만 그 마음보다 실컷 쓰면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 더 크다.
몇 년치의 일기와 기획서를 더 쓰려면, 더 많은 여행지를 그리려면 이 한 자루가 꼭 필요하다는 최면을 스스로 걸면서.
석가모니는 그래서 인간이 우습다고 하지 않던가. 누구나 죽는다는 걸 알면서 자신만은 평생 살 것처럼 구는 것. 그런 인간이라서 만년필을 모으고 글을 쓴다. 인간이 존재하는 이상 인간적인 것은 사라지지 않을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