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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우 Aug 06. 2021

변치 않는 사람보다 자연스레 변하는 사람이 좋습니다

자연스럽게 변하는 것, 로러&클링너 잉크 Rohrer & Klingner

오래된 것일수록 최신의 설비가 못 미더워 초기 방식을 그대로 계승 중인 경우가 많다.

낡은 것과는 또 다른데,  이것을 보수라 부르는 이들도 있다.


헌데 그런 것들의 대부분이 내겐 전통에 대한 단순한 집착이거나 발전에 대한  지나친 외면으로 보일 때가 많았다. 전통의 방식을 고수하려면 그 전통의 방식으로 만들어진 제품이 현대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제품보다 훨씬 우수해야 한다고 믿었다. 사실 그런 제품은 많지 않다.


로러&클링너 잉크는 그런 경쟁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제품이다. 로러&클링너 잉크는 1892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개발된 100년도 훨씬 더 된 잉크인데 지금도 전통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1907년 창업주의 아들이 고안한 수작업 생산방식만 고수하는 고집은 여전히 스마트폰이나 IT 기기들을 미심쩍어하는 ‘첨단 부적응자’인 나와 묘하게 닮았다. 



온라인 공간에 글을 쓰기보다 가급적 오프라인 공간에 손으로 쓰려한다. 그게 좀 덜 휘발되고 좀 더 잘 기억되고 오래 남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도 있다.

그런 기대가 만년필과 잉크라는 도구를 통해 외화 되는 모습은 포기하기 힘든 경이로움이다. 




뚜껑을 열면 병 속에 갇혀있던 묵은 포도주보다 맑고 깊은 검은색이 드디어 공기를 만나 기지개를 켠다. 만년필 잉크를 좀 사모아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잉크가 무슨 색이든 가득 담겨있으면 미상불 검은색이란 사실을. 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 감기약 같은 패키지에 얼굴을 가까이 갖다 대보면 비릿한 숲 냄새 

같은 것도 난다. 아마 포함된 다양한 천연재료 때문인 듯하다. 신비한 녀석이다. 


천연재료니 수작업이니 하는 단어들에서 짐작이 가겠지만 로러&클링너는 만년필 잉크 치고 비싸다.

물론 천연재료니 전통 제작방식이니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혹했던 것은 아니다.

내가 반했던 점은 오직 한 가지, 눈에 보이는'오묘한 색' 뿐이다.


만년필의 매력이 글을 쓰는 부드러움 (애호가들은 이를 통칭해 ‘흐름’이라고 한다.)에 있듯  잉크의 매력은 영롱한 발색과 자연스러운 변색에 있다. 

여기서 나는 로러&클링너가 가진 훌륭한 발색과 매력적인 변색이 궁금했던 것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만년필 필기의 매력이 이 변색에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세월은 고여 있지 않기에 아무리 영롱한 발색의 잉크라도 결국 변한다. 시계의 시침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움직이고 있듯 이 색상도 우리 눈엔 보이지 않지만 세월이 지남에 따라 천천히 변하고 있는 것을 잉크를 통해 알게 된다. 


물론 이런 대단한 교훈(?)을 주려고 일부러 변색되는 잉크는 없겠지만.




장인의 잉크가 새어 나와 사각거림과 함께 글씨를 만들어 갈 때면 사뭇 경건해지기까지 하다. 세월의 부침 속에도, 자고 일어나면 바뀌는 빠른 변화 속에도 여전히 따사로운 색과 자연스러운 변화를 가진 잉크가 있다는 사실이 특히 그러하다.  


한결같은 사람이고 싶다는 꿈은 포기한 지 오래다. 다만 자연스럽게 변하는 사람이고 싶다는 바람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대체 그 비결이란 것이 무엇인지 비결이 있긴 한 것인지 모르겠다. 오래된 사물에는 우리가 풀지 못한 그런 수수께끼가 너무 많다. 


사는 동안 그저 주변의 좋은 것들을 실컷 즐기다 잘 죽기만 바라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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