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세이건 <코스모스> 를 읽고
‘생각하면 할수록 내 마음을 놀라움과 존경심으로 가득 채워주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밤하늘에 빛나는 별과 내 마음 속 도덕법칙이다.’
이 명구는 칸트의 묘비석에 새겨져 있는 문구이다. 칸트는 왜 별을 보며 인간 내면의 도덕법칙을 이야기하는가? 별은 현대적 개념으로는 천문학, 곧 자연과학의 영역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별은 칸트로 하여금 절대적인 인생의 지침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이는 자연과학과 인문학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인문학자를 꿈꾸는 나는 왜 자연과학을 탐구해야 하는가? 그에 대한 답을 학문의 근본 이유와 존재의 의미 탐구, 그리고 학문적 겸허함의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자연과학과 인문학은 본질적으로 같은 탐구의 과정이다.
무의미한 현상에 호기심을 가지게 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그 원리를 탐색하게 한다는 면에서 두 학문의 뿌리는 같다. 인류사의 수많은 철학과 과학의 담론은 ‘나는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서로 다른 답안지라 할 수 있다. 칼 세이건은 별을 ‘우주의 부엌’이라고 칭하며 우리 또한 모두 별의 아이들이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인류는 ‘나’와 우주 간의 필연적 연결고리를 깨달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과 우주와의 관계를 고민한다. 그를 풀기 위한 학문은 인문학이든 자연과학이든 상관없이 우리를 둘러싼 ‘무의미성’과 ‘혼돈’을 극복하고, 세계에 유의미한 질서를 부여하고자 하는 활동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같은 목적을 지닌다.
둘째, 자연과학은 인문학이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을 막고 다시 현실로 회귀하게 해주는 매개체이다.
인문학이 지나치게 사변적인 관념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순간, 인문학은 현실 감각을 잃고, 효용 없는 학문으로 전락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인문학자에게 자연과학은 현실감각을 유지하게 하는 지렛대 역할을 해준다. 다윈은 창조론에 갇혀있던 사람들의 인식의 방향을 돌려, 변이와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의 메커니즘을 설명함으로써 현실세계의 동식물의 변화를 바라보게 하였다. 허블은 외계 은하 성운들의 선속도와 거리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며 우주 팽창의 원리와 ‘대폭발’의 시점을 알아냈다. 인간과 우주의 근원과 목적에 대해 인문학이 종교적 설명에 심취해 물리적 세계를 버리고 관념의 세계로만 치닫던 그때, 자연과학은 인문학이 결정적 균형감각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나는 미래의 인문학자를 꿈꾼다. 그러나 인공지능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문학자가 인간과 기계의 차이를 논하고, 고유의 인간성을 논하는 담론은 현실감각을 잃은 반쪽짜리 답안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자연과학을 탐구해 실재와 관념의 세계를 잇는 인문학자가 되고자 한다.
셋째, 자연과학은 ‘나’와 인류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학문적 겸손함을 일깨운다.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태도는 계속해서 배우고자 하는 태도와 양립할 수 없다. 하지만 자연과학을 배우는 순간, 학문에는 끝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거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와 행성들이 회전한다는 새로운 우주 모형을 제시하며 발상의 전환을 시도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고정 관념이 강했기 때문에 그의 우주 모형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옳다는 오만에 빠져서 진실을 알지 못한 것이다. 빛이 커질수록 어둠의 경계선이 커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지식이 늘어날수록 인간은 얼마나 무지한지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 우주에 대한 탐구이다.
지금도 계속해서 팽창하고 있는 저 넓은 우주 속에서 내가 아는 것은 얼마나 작은 조각인가? 나의 생이 인류공동체에 가치 있는 발자취를 남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나는 별을 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별을 보고, 별처럼 우리를 이끌어줄 윤리를 고민하는 사람만이 광활한 자연과 우주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우주적 위치를 확인함으로써 비로소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자연과학을 탐구하는 인문학자를 꿈꾸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