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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랑자 Apr 13. 2024

카뮈의 <이방인> :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법


“다른 사람들도 역시 장차 사형 선고를 받을 거야. 신부인 그 역시 사형을 선고 받을 거야.”

 


책의 마지막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뫼르소는 다른 사람들도 어느 날 사형 선고를 받을 것이라고 한다. 그는 한 아랍인을 죽이고, 재판을 거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도대체 왜 다른 사람들도 사형 선고를 받을 것이라고 하는가?

 


모든 인간의 삶은 죽음을 전제한다. 사람이라면 모두 언젠가 죽는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뫼르소의 말대로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에 대한 선고를 받는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에, 그가 다른 사람들도 사형 선고를 받을 것이라고 한 것도 합리적인 이야기가 된다. 죽음이 예정되어 있는 삶이라는 건 당연한 말이지만, 삶의 종착지가 무조건 죽음이라는 것을 상기하면 조금 가슴이 답답해지는 듯하다. 죽음 없이 삶은 존재하지 않는데,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 없는 이 유한한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이방인>에는 여러 죽음이 등장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라는 유명한 첫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시작부터가 어머니의 죽음이다. 1부의 마지막에서는 뫼르소가 한 아랍인을 죽이고, 2부의 재판 이후 뫼르소는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을 처지에 놓인다.



<이방인>에서 뫼르소의 삶의 태도와 책에 등장하는 죽음을 보며, 우리는 자연히 삶과 죽음은 항상 공존한다는 것을 깨닫고 삶의 태도를 고민할 수 있다.

 


1부에서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자유로운 일상을 영위했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렀고, 휴가를 보내며 데이트를 했다. 일도 했고, 레몽이란 사람을 만나기도 했고, 바다에도 갔다. 그러나 1부의 마지막에서 그는 한 아랍인에게 총을 쏴서 그를 죽이면서, 자신이 침묵을 깨고 불행의 문을 두드렸다고 생각한다.

 


2부는 1부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1부의 뫼르소는 자신의 의지대로 흘러가고 있었다면 2부에서 뫼르소는 타인에 의해 끌려다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부에서 뫼르소가 지나온 시간들은 2부의 재판정에서 타인에 의해 판단되고, 해석되고, 평가된다. 게다가 이상하게도 재판의 쟁점은 아랍인의 죽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기보다는, 뫼르소가 어머니의 죽음에 보인 반응에 집중되어 있다. 이때 뫼르소는 재판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하려고 시도하지도 않는다. 적당한 가식과 변명만 있으면 타파할 수 있는 논리에도 침묵하며, 아랍인을 죽인 이유도 태양 때문이었다고 말해버린다. 그는 결코 자신을 굽히지 않는다. 앞서 2부의 뫼르소가 1부와 비교하여 타인에 의해 끌려다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적었지만, 이렇게 보면 그것은 그저 표면적인 것일 뿐 사실 뫼르소는 2부 내내 침묵으로서 누구보다 굳건하게 자신의 의지를 지키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2부의 마지막 부분에서, 뫼르소가 모든 인간의 삶은 죽음으로 끝난다는 명제를 수용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뫼르소는 그가 보고 겪은 일들에 대하여 다 무슨 상관이냐고 외치며 모두 덧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또한 그는 다른 사람들도 역시 사형 선고를 받게 될 것이라고 했고, 자신의 부조리한 삶 동안 미래로부터 어두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이후 그는 문득 어머니가 죽음 앞에서 새로운 시도를 한 것을 이해하며, 행복을 느끼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라고 생각한다. 즉 뫼르소는 죽음의 앞에 서서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죽음을 인지하고 나서야 ‘다시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는 이때 깊은 고뇌를 잊어버리고 행복과 평화를 되찾았다.

 


1부의 뫼르소는 흘러가는 대로 살았다. 2부의 뫼르소는 타인에 의해 흘러가는 법정 속에서 재판을 받으면서도 스스로 간직한 진실을 훼손하지 않고 살았다. 그리고 그 끝에 이르러 유한한 삶과 삶의 덧없는 면을 수용했고, 이에 대해 절망이 아닌 평화를 느끼게 된다.



우리는 1부와 대비되는 2부의 뫼르소로부터 끝이 죽음이라는 선고라고 할지라도, 외부 요인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진실한 태도를 갖고 죽음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삶’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배울 수 있다. 즉 죽음이란 언젠가 다가올 수밖에 없는 선고와도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수용한다면, 막연히 흘러가는 삶이나 타인에 의해 해석되는 삶에서 벗어나 한 단계 성장한 자유와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삶이 죽음으로 가는 시간에 불과하다면 인생 자체가 ‘이방인’의 여정이라는 생각도 든다. 인간은 죽음을 선고 받은 채로 잠시 삶을 거쳐 가는 것이므로 삶이 이루어지는 이 세계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없이 긴 시간 중에 순간을 지나가게 되기 때문에, 이 넓은 우주의 입장에서는 그저 잠시 스쳐가는 ‘낯선 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삶의 허무함을 깨닫고 무기력해지기보다는 뫼르소가 그러하였듯 죽음을 이해함으로써 새로운 시도를 시작하고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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