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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재 Oct 29. 2024

열차 여행

열차 여행이란 말은 참 마음을 설레게 한다. 따뜻한 햇살에 녹아내리는 처마 끝의 고드름처럼 한가로움이나 자유도 느껴지고 또 낭만이 떠오르기도 한다. 천연덕스럽게 살아나는 이런 느낌은 아마도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지나간 추억 때문인 것 같다. 수학여행이나 MT의 기억들이나 밤을 꼬박 새우면서 타고 다녔던 기억들 같은 추억.


지금의 열차 안 풍경은 많이 다르다. 노래를 부르고, 시끄럽게 게임을 하고, 음식을 먹고 마시며 떠들썩해도 괜찮았던 그 시절의 열차, 그러나 지금은 전화마저도 목소리를 죽여서 속삭이듯 하거나 아니면 객차 사이의 연결 통로로 나가야 된다. 또 빽빽하게 서있는 사람들 사이를 뚫고 다니면서 먹을 것들을 팔던 홍익회의 이동 매점도 이미 없어진 지 오래다. 타인에 대한 배려인지, 삭막해져 가는 삶의 한 단면인지, 시대의 결과물인지 모르겠다. 


달리는 열차의 창밖을 통해 먼 산에 눈을 맞추면 머리도 맑아지고 시력도 좋아지는 기분이 든다. 그러다 문득문득 가려지지 않은 도시의 이면이 보인다. 지저분한 벽들과 정돈되지 않은 환경들이 억지로 가려놓은 장막 틈 사이로 보이지만, 시선을 피할 곳은 마땅치가 않다.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숨겨놓은 것들을 찾아낸 기분이라 몹시 민망하다. 빨리 논과 밭 너머 멀리 푸른 산이 나타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누군가를 멀리 떠나보내고 돌아가는 열차 여행이지만 생각보다 담담하다. 설렘이나 낭만 같은 풋과일이 잘 익어서 달콤한 맛으로 변한 것처럼, 왠지 모를 안도감과 차분함이 느껴진다. 누구나 떠나가게 마련이라는 사실,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규칙이라는 사실 그리고 떠나는 그 순간에 떠오를 기억과 남길 기억들을 생각하다 보니, 이 삶은 더 예뻐지고 사람들은 더 소중해지는 것 같다. 떠나간 이로부터 따뜻한 선물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다.


바싹 마른 손을 잡고 얘기를 나누었던 며칠 전의 기억이 떠오른다. 자유롭지 못한 몸이 짓누르는 고통에도, 그럴 리 없는 마음은 무척 편안하게 보였다. 지금까지 참고 견디느라 몸과 마음은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을까? 그 마음을 들킬까 봐 또 얼마나 마음이 쓰였을까? 자유로웠던 지난 시간들은 또 얼마나 그리웠을까? 왜 나는 이 자유로운 시간들을 좀 더 나누지 못했을까?


열차를 선택한 것은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갑작스럽게 오가느라 시간을 맞추고 갈아타는 어려움은 있었지만,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하고 또 후회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서 다행이다. 그리고 지금부터의 삶은, 그 삶이 누구의 것이든 또 어떤 삶이든 조금 더 다정하게 대해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시간이 지나다 보면 추억도 하고 후회도 하게 되겠지만. 그러나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이 순간을 기억할 수 있다면 좋겠다. 만약 누군가 떠나는 나로부터 조금이라도 따뜻한 기억을 가질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다.


창 밖에 쏜살처럼 열차 한 대가 큰 소리를 내면서 지나간다. 문득 앞 등받이에 꽂혀있는 여행책자가 눈에 들어온다. 만약 내게 무한 자유가 주어진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선택할까? 쉽게 선택이나 할 수 있을까? 하나하나 따지기만 하다가 그 자유를 놓쳐버리지나 않을까? 혹시 선택을 했더라도 곧이어 그 선택을 걱정하고 후회나 하지 않을까? 걱정을 하고 후회를 하더라도 그 순간 진솔했고 배려를 한 것이라면 괜찮지는 않을까? 이미 봤듯이, 사람들을 위한 배려가 사회적 인식과 규범을 바꿨고 그래서 조용한 열차로 변신했던 것처럼, 지금 우리의 마음이 어느 순간 또 바뀐다 해서 문제 될 건 또 무엇인가? 그저 소중하다고 여겼던 기억을 잃지 않고 간직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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