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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야 May 15. 2023

인생작 갈아치웁니다...

장월신명 후기


뮤지컬 < 위키드 >, 드라마 <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 >, < 악의 꽃 >, < 진정령 > 그리고 < 창란결 > 까지.


내가 인생작이라 부르는, 일상 생활을 제대로 영위하지도 못할 정도로 몰입했던 작품들이다. 신기하게도, 하나같이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작품의 중심이 되는 인물이 선과 악을 오가는 복합적인 캐릭터라는 점이다.


그들은 종종 신념을 따라 세상과 맞선다. 그 과정에서 온갖 오명을 다 뒤집어 쓰는 것은 물론이다. 악인이라 불리며, 때때로 자기 자신조차 그 오명을 믿는다. 겉으로는 하나같이 건방지거나, 냉담한 성격을 보이기 때문이다. 사회성과 감정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도 종종 있다. 피땀눈물을 동반한 사건을 맞닿뜨리고, 실패와 더불어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버림받는다. 하지만 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정의롭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번에 시청한 < 장월신명 > 은 그러한 나의 취향을 제대로 부합한 작품이었다.


사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선협물의 전형적인 클리셰를 벗어나지 않았다. 신의 피를 이어받은 여주인공, 려소소가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마신에 맞서 그가 아직 힘을 얻기 전으로 돌아가 사랑을 통해 그를 구원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웠던 점은 마신의 운명을 타고난 담태진이라는 캐릭터였다.


보통, 이러한 류의 작품은 순수했던 소년이 세상에게 외면받아 악해졌다는 서사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담태진은 태생부터 순수하기는 커녕...끔은 오은영 선생님을 불러 앉혀놓고, 금쪽아 왜 그런거니..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물론, 세상이 유난히 그에게 잔혹했던 것은 맞는 말이다. 즉위가 유력한 황자로 태어났으나,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슬픔에 아버지는 그를 냉궁에 방치했다. 다른 황자는 물론이고, 궁내 종들까지 그를 천대하고, 폭력을 일삼으며, 자신을 유일하게 보살펴 주었던 유모들 또한 그를 혐오하고, 궁을 나갈 기회를 주겠다는 말 한마디에 그를 살해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렇게 불공평한 상황에 담태진은 자신을 더 가혹하게 단련해 맞선다.


배를 곪지 않고 뭐든 얻어 먹기 위해 자존심을 버렸으며, 자신을 괴롭힌 이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기억해 몇 배는 더 잔혹하게 복수하기를 꿈꾼다. 물론 그 중 몇몇은 직접 실행으로 옮기기도 한다. 또 의심은 얼마나 많은지. 중독되어 죽어가는 와중에 독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여주가 준 해독 과일을 옷소매에 숨겨두는데, 헛웃음까지 나올 정도였다. 금쪽아...어차피 죽는데 일단 시도라도 해보는게 좋지 않겠니...


그래서일까, 어쩌면 담태진은 꼭 그러한 성장 배경이 아니었더라도 마신의 길을 걷지 않았을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그런 그에게 려소소가 나타난다.


공격적으로 세상을 대하는 그에게 그녀는, '꼭 이렇게 살지 않아도 되는구나' 를 가르쳐준 사람이었다. 자신이 굳이 나서기도 전에 지켜주고, 걱정해 주었다. 아마, 그녀를 통해 담태진은 난생 처음으로 안정감이라는 것을 배웠을 테다. 날을 세우지 않아도, 의심하지 않아도, 아니 어쩌면 자신의 치부를 다 드러내는 한이 있더라도 곁에 남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에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 또한 진심은 아니었다. 일단 담태진이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어 마골을 파괴해야지만이 그의 부활을 영원히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려소소 또한 언제부턴가 자신의 마음이 단지 사명감인지, 진짜 사랑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고는 하지만...그래도...일단 목적이 불순했으니 말이다.


그저 행복할 줄만 알았던 혼롓날 배신당하고 그는 울부짓는다. 만약 네가 나의 사랑을 그토록 우습게 여긴다면, 나의 증오는 어떻겠느냐고. 그러는 동시에 그녀로 하여금 도망가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도록 감옥에 가둬둔다. 담태진의 불안한 심리 상태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어둠 속에서 그녀가 어떤 고통을 받던지 일단 자신의 곁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동시에, 어쩌면 담태진은 려소소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평생 괄시만 받아온 그였기에 누군가 자신을 사랑하고 보호해 준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좋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착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후조차도, 난생 처음 느껴본 감정을 놓아 버릴 수 없었을 터이다.


이것을 나는, 사랑이 아닌 얄팍한 자기 연민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사랑이란 크기가 큰 감정이고, 누군가로부터 받은 것이 흘러넘쳐 다른 이에게 닿는 것이기 때문이다. 담태진은 애당초 비워져 있던 사랑이란 그릇에 무언가 채워넣을 것이 필요했을 뿐이다. 결핍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주변의 사람들을 같은 어둠으로 끌어내리는지 잘 보이는 예였다.


결국, 려소소 또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여 담태진의 마골을 자신의 고귀한 선골과 바꾼다. 다음 생에는 절대로 만나지 말자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과 함께.


그 후 담태진은 자그마치 500년 동안 죽은 려소소의 영혼을 찾아 헤맨다.


나는 다름 아닌 이 시점이 담태진에게는 려소소를 향한 감정을 사랑으로 키운 기회가 되었다고 본다. 그녀를 그리워한 세월이 함께한 세월보다 많아진 이상, 그토록이나 집착했던 사랑받는 기분, 안정감조차 잊혀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담태진은 여전히 려소소를 찾아 헤매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애써 일궈놓은 것을 모두 잃고, 살아남은 그에게 남겨진 유일한 과제이자 삶의 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담태진의 가슴 속에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은 남아 있지 않을 터이다. 이미 려소소만으로 꽉 차 버렸고, 아마 그것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지나치게 방어적이었던 초반과는 달리, 쉽사리 희생을 결심한 후반부에 대한 나름의 해설이 될 것이다.


하늘도 그런 담태진에게 감동한 덕일까,


려소소는 부활하고, 재회한 담태진과 행복한 미래를 꿈꾼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멸망시키는 마신이 될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려소소의 그 모든 고생에도 불구하고, 담태진은 결국, 그 운명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만 한 점은, 사실 담태진이 마신이 되냐 되지 않냐는 애당초 중요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담태진이 그 마신이라는 신분을 어떻게 이용하느냐가 세상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다.


극중 이러한 말이 등장한다.


어둠이 없는 빛은 존재하지 않지만, 어둠은 어둠 그 자체만으로 충분하다고. 하지만 어둠을 구원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빛 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어둠' 즉, 마신인 담태진은, '빛' 즉 신의 피를 이어받은 려소소가 각성해야지만 소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선문 세가 내부의 분열과 욕망으로 초대 마신이 세상을 겨냥해 설치해 두었던 저주가 작동된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저주와 삶과 죽음이 연동되어 있는 환생한 버전의 마신, 즉 담태신이 희생해야만 했다. 결국, 담태진은 마신이 되어, 그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사람, 려소소의 증오를 감내하면서까지 그녀를 각성시켜 소멸한다.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떤 드라마들 중에 가장 충격적인 결말이었다.


그냥 담태진이 행복하고 평안하게 사는 것을 보고 싶었을 뿐인데...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싶고...메세지 하나는 명확하지 않았나 싶다. 선과 악, 그리고 정의는 다르다는 것이다.


작품 속에서 선과 악은 타고나는 것이었다. 신의 핏줄인 소소는 선이며, 마신의 운명을 타고난 담태신은 악이다. 그렇게 타고난 것을 바꿀 수 없지만, 그를 어떻게 이용하느냐는 그들에게 달린 것이다. 담태신은 세상을 파괴할 힘을 가지고 자신을 파괴했으며, 그는 사랑하는 여자, 소소가 사랑했던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비록 세상은 자신에게 줄곧 잔인했지만 말이다.


난생 처음 드라마가 막을 내린 순간, 주인공에게 고생했다는 말을 해주고 싶은 작품이었다.


고생했다, 진아.


마신으로 죽어 다시 태어나지는 못하겠지만, 죽어서나마 평안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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