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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야 Aug 02. 2023

사랑이란 그릇

드라마 향밀침침신여상 후기

나는 시청할 드라마를 선정할 때 이상한 고집이 있다. 내 취향의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으면 쉽사리 손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로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요소들을 나열해 보면 이렇다 : 


주인공은 안티히어로이며, 급격한 신분 상승을 겪는다. 어린 시절의 결핍으로 사회성이나 감정 표현에 문제가 있어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한다. 이때, '햇살' 여주 또는 남주가 그런 주인공을 구원해 준다. 그래서 주인공은 상대를 거의 병적이라 해도 될 정도로 집착한다. 계략적이며, 똑똑하다. 전체적으로 병약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신념 앞에서는 대쪽같다. 세상 모든 사람들의 비난을 받더라도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간다. 


생각해 보면, 내게 '인생작'이라 여겨지는 작품 모두 이러한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중국 드라마의 교과서라고도 불리는 < 향밀침침신여상 >을 보류한 이유 또한 여기에 있었다. 남자 주인공이 천계의 사랑받는 황태자인 욱붕이었던 것이다. 어려움을 겪지 않았기에 결핍도, 주름도 없는 그는 내 취향에 조금도 부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 장월신명 >으로 라운희를 알게 되고, 필모 깨기를 하는 과정에서 < 향밀침침신여상 >은 피할 수 없는 작품이었다. 라운희가 지금의 위치에 있기까지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작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 발 늦게 그가 맡은 서브 남주, '윤옥'은 욱봉과 정반대의 인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윤옥'은 자신의 이복형제인 '욱봉'과는 달리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고 태어났다. 사생아로 태어난 바람에 천후의 견제를 받으며 자랐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해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수긍해야만 했다. 그것이 설령 자신보다 더 낮은 이들의 멸시와 모욕일지라도. 매 순간, 천후가 만들어둔 덫에 빠지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욱봉과 비교하여 모든 것이 부족한 자신을 학대했다. 


그러던 중 금멱이 나타났다. 그녀는 윤옥을 아무런 편견 없이 바라봐 준 유일한 인물이었다. 후에는 그런 그녀가 자신의 약혼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잃고 싶지 않았다. 이번 만큼은. 평생을 억눌려 살아왔지만,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도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실제로, 무슨 일이든 했다. 그것이 자신의 형제, 아버지를 죽이고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일지라도. 그렇게라도 하면 그녀를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지킬 수 있는 힘이 생길 것 같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금멱은 욱봉을 사랑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 그는 윤옥이 간절하게 원했던 한 가지, 금멱마저 빼앗아갔다. 비겁하지만, 그런 그를 질투하고, 미워하게 되었다. 


하지만 윤옥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조차 모르고 있었다. 윤옥은 금멱을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을 한다면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예민하기 마련인데, 윤옥은 자신의 집착을 끊임없이 주입시킬 뿐이었다. 아마,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기에 사랑을 할 수도 없는 것이겠지. 


사랑이란 넘치도록 사랑을 받아 마음 속에 있는 그릇이 넘치고 흘러 다른 사람에게 닿는 것이다. 애초에 그 그릇이 빈 사람은 사랑을 줄 수 없다. 단지, 무언가 채워보고자 집착하고 자신의 결핍에 모두를 끌어들일 뿐이다. 


내가 인생작이라고 여기는 위의 작품들에서는 여주인공이 그 그릇을 채우는 역할을 했었다. < 장월신명 >의 려소소도, < 진정령 >의 남망기도, < 창란결 >의 소란화도, < 악의 꽃 >의 차지원도....상대와 함께 하는 것이 불행해지는 길이래도 기꺼이 그 불행을 감수했다.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에. 그렇기 때문에 숭고했다. 


하지만 금멱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과 사랑하기를 원했다. 안타깝지만, 그녀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긁어내어 상대를 채워주는 일은 결코 쉽지 않으니까. 외로움은 결국, 자신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이다. 


그래서 나는 윤옥에게 주어진 결말이 최선이라 생각한다. 


비록 원하던 단 한가지는 얻지 못했지만, 그 과정에서 복수도 하고, 황좌에도 올랐으니, 더는 설움받는 황자가 아닐 터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윤옥에게 기꺼이 희생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나타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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