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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돌핀 Dec 08. 2021

사용자와 노동자는 언제까지 ‘갑과 을’이어야 하나?

갑을관계가 아닌 평등관계로 전환되어야

그동안 한진그룹 총수 일가에서 일으킨 논란들을 정리한 위키백과 내용을 보면 그 유명한 ‘땅콩회항’을 비롯해 물벼락 갑질 사건, 집사 및 수행 기사 폭언 논란, 대한항공 경비 용역 노동자 사택 노예 갑질 사건, 제주 칼호텔 접시 폭행 논란 등 무시무시한 사건들로 가득하다. 


만약 이러한 폭언과 폭력이 직장 밖에서 발생했다면 어땠을까? 바로 정당방위로서의 행동을 하거나 경찰 부르고 고소하는 상황이 펼쳐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직장 내에서는 이러한 일이 다반사로 발생하며 그에 대해 노동자들은 제대로 대응하기도 어려운 것일까. 


그 이유는 근로계약서나 취업규칙 내용을 보면 명령을 따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위계적 명령을 따르기 싫으면 언제든 회사를 그만둘 수 있다. 하지만 남아있으려면 명령에 따라야 한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위계와 명령을 자발적으로 따르게 되고 상급자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위계가 극대화되면 폭언, 폭행 등 심각한 범죄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직장 갑질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어디서나 존재하는 이유는 회사가 위계와 명령의 조직이라는 것을 구성원이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직장 갑질이나 부당한 명령을 왜 받아들이는 걸까? 형식적으로 평등하고 자유로운 시민이지만 위계와 명령의 조직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이유는 당연히 생존을 위해서다.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참고 버티는 것이다.  


한진그룹 갑질 사건 등이 터질 때마다 평등한 직장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근로기준법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서는 머나먼 이야기일 뿐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직장 갑질 문제는 어떻게 보면 필연적일 수 있다. 생산수단과 생산물을 사용자가 전부 소유하는 자본주의에서는 사용자의 통제에 따라야만 하고 그래야만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자본주의 나라의 노동자들이 그 위계에 굴복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하면서까지 직장에 얽매이지는 않는다. 노동자들의 힘으로 사용자와 노동자의 관계를 대등하게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등한 관계를 만들어나가기 위해서는
현재의 불평등한 노동 현실을 감수하거나
언론에서 쏟아내는 노동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사용자와 노동자의 관계를 다시 정립할 필요가 있다. 


보통 우리는 ‘근로계약’이라고 하면 노동을 제공할 시간 등을 정하고 그에 상응하는 돈을 받기 위해 사용자와 노동자가 맺는 계약이라고 생각한다.  


근로계약에 대해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사용자가 혼자 못하는 일을 내가 도와주는 것이라고 말이다.  


골목식당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식당 사장이 만든 음식이 대박이 나서 많은 손님이 줄 서서 기다리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다. 손님은 쏟아지고, 몸은 하나고. 그럴 때 사장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뭐가 있을까? 첫째, 더 부지런히 뛰어다닌다. 둘째, 혼자 감당할 만큼만 손님을 받는다. 셋째, 손님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직원을 채용해서 일을 나눠서 한다.  

대기 손님으로 꽉찬 매장의 모습

많은 경우 직원을 채용해서 손님의 수요를 담보한다. 그렇게 우리는 근로계약을 맺고 노동을 한다. 사용자가 혼자서 못하는 일을 도와주는 동료나 다름없지 않은가. 실제로 협동조합처럼 운영되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대등하게 노동하고 그런 관계가 정립되도록 법·제도적으로 개선해 나가야 한다.  


예전 근로계약서에는 진짜로 갑과 을로 명시가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갑,을 표시가 사라졌다. 대등한 관계에서 근로계약을 맺는 의미가 반영된 것이다. 그러면 실제로도 대등해져야 한다.  


예를 들어 책상을 만드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처음에는 어떤 사람이 혼자서 만들어 팔았을 것이다. 그러다 주문이 많아지면 같이 일할 사람이 필요해진다. 같이 일할 사람을 구하게 되면 그때부터 처음에 만들던 사람은 사용자가 되고 같이 만들러 온 사람은 노동자가 된다. 이렇게 같이 일하러 가는 관계가 옛날에는 주인과 노예였고, 지주와 소작농이었다. 그 사회가 그렇게 규정하는 것이다. 그 규정이 정의로웠는가? 


지금은 사용자와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사용자와 노동자의 관계는 우리가 규정하는 것이다.


다시 규정해보자. 근로계약은 사용자가 몸이 안 좋아서든, 24시간 편의점에 서 있기 힘들어서든, 하루에 전단 5만 장을 뿌리기 힘들어서든, 동시에 햄버거 만들고 서빙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기 힘들어서든 어쨌든 사용자가 못하는 일을 해주는 것이라고 말이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근로자’에 대해서는 대부분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 “근로에 의한 소득으로 생활하는 사람” 등으로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는 반면에 노동자에 대해서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얻은 임금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 “법 형식상으로는 자본가와 대등한 입장에서 노동계약을 맺으며, 경제적으로는 생산수단을 일절 가지는 일 없이 자기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삼는다.” 등으로 조금 더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여기서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자본가와 대등한 입장에서”라는 문장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자본가들이 노동자와 대등한 입장을 거부하기 위해 근로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용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보면 좋을까? 우리 사회에서 사용자라는 말보다 사장님이라는 말이 통용되는 이유도 말 자체에서 위계적인 관계를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일하고 사용자는 그에 대한 대가로 돈을 주는 사람이 사용자일까? 사용자와 나도 모두 함께 일하는 노동자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사용자는 매장을 관리 운영하는 역할을 하며 내가 없는 시간에 일하는 노동자이고, 나는 사용자가 하는 역할 외에 또 다른 역할을 맡은 노동자라고 말이다. 우리는 보통 갑을관계로 생각을 많이 하는데 이렇게 보면 서로 동등한 관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같이 일하는 공간에서 좀 더 당당하게 사용자에게 내 주장과 의견을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편의점 점주나 직접 배달하는 치킨집 사용자를 생각해보면 사용자도 노동자라는 말이 쉽게 이해될 것이다.


 “나는 일하지 않고 돈만 주면 되는 사장이고 너는 열심히 일해도 최저임금만 받으면 되는 종업원이다”라는 사용자들의 사고방식을 바꿔야 한다.  

사용자도 함께 일하는 노동자일 수 있다는 생각이 기존의 인식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된다.


사용자는 놀기만 하고 노동자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일을 하다가 쓰러진다면 어떨까? 최소한 같이하거나 그게 어려우면 다른 노동자를 고용해야 한다. 그런 것이 회사를 관리 운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2명이 하던 일을 1명이 하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노동의 힘듦과 욕설 등 인격적 모욕에 순응하고 감내해서는 안 된다. 


근본적으로 구조가 바뀔 때까지 평등을 추구해야 한다.
사용자도 노동자도 노동을 통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한다.
수직적인 위계관계가 동등한 관계로 새롭게 정립될 때까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당당하게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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