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데이지 Mar 30. 2022

"넌 왜 아직 결혼 안 해?"

37살 싱글로 살면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오후 2시, 핸드폰이 울렸다. 오랜만에 보는 이름, 

"민희" 


몇 초를 잠시 고민하다 전화를 받았다. 

"살아있었네!?"라고 말하는 2년 만에 들은 친구의 목소리. 


정확하게는 2년 반 만에 한 친구와 재회했다. 대학시절 만난 친구이지만 같은 동네에 사는 이유로 편리함이 좋아  약속 없이도 점심과 커피 한잔을 매주 함께 하던 사이였다. 

몇 년을 가족보다 더 자주 보는 사이로 지냈지만 언젠가부터 문자 한 통도 주고받지 않는 사이가 되어있었다. 


2년 반 만에 한 번 만나자는 친구의 제안에, 그러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틀 뒤 그녀를 만났다. 


2년 만에 재회한 친구와는 어떤 말을 해야 하나? 

혼자서 두 남매를 키우던 그녀는 재혼해서 네 식구가 되었다고 했으며 새로운 근무지로 옮겨서 오전만 일을 한다고 했다. 그녀의 직장 얘기, 두 남매 얘기 등 소소한 대화가 오고 가고 있을 무렵 민희가 나에게 문득 질문했다. 


"넌 왜 결혼 안 해?" 


서른일곱 살 싱글인 친구에게 결혼하지 않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돈가스를 입안에 막 구겨 넣은 직후에 들은 질문은 도대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순간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단 한 번도 혼자 앉아서 나는 이러한 이유로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심각하게 사색해 본 적이 없어서일까? 그저 남들처럼 하루하루를 열심히 평범하게 살 다 보니 서른일곱 살이 되었고, 결혼은 아직 경험을 하지 못 한 것뿐, 딱히 결혼하지 않아야 하는 중대한 사유가 있는 것은 아녔기에 "왜?"라고 묻는 질문은 언제 들어도 참으로 당혹스럽다.


일단 질문을 받았기에 머릿속에 생각나는 이유 중 가장 그럴싸한 이유를 재빨리 생각해내 끄집어냈다. 


"글쎄... 일단 자유롭고 싶은 거? 내일이라도 당장 미국에 박사학위를 밟으러 가고 싶으면 갈 수 있는 자유가 좋아서?"


나름대로 그럴싸한 이유를 들었으니 '그래, 너는 원래 학구 파니까'라고 인정하고 대화 주제를 바꾸겠지라고 섣불리 생각한 내가 이내 초라하게까지 느껴졌다. 그녀의 반응 때문이다. 


"결. 혼. 해. 서. 남편이랑 같이 미국 가서 학위 밟으면 되잖아?"  


순간 내 얼굴이 화끈 붉어지는 게 느껴졌다. 이럴 때 마스크를 끼고 있어야 하는데, 밥을 먹다 말고 그대로 내 감정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것에 순간 수치심마저 들었다. 


"아무래도 결혼해서 외국을 가면 좀 힘들지... 혼자가 아니니까"


갑자기 대화의 주제가 '미혼일 때 외국에 학위를 받으러 가야 하는 이유'가 되어,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눠 원하지도 않아던 토론장에 강제 초대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문득 2년 만에 만난 친구가 저녁식사 중 무심히 생각 없이 그저 툭 던진 질문에 나는 왜 돈가스를 먹다 말고 침 튀겨가며 내 삶의 중대 결정을 변호하고 있어야 하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질문을 받은 후로는 가뜩이나 심심했던 그녀와의 대화에 찬물을 확 끼얹은 것처럼 흥미가 단번에 뚝 떨어졌다. 언제 자리를 떠나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찰나에 직원이 와서 영업 종료를 안내했다. 코로나로 인한 영업제한 9시가 가장 반갑게 느껴진 최초이자 마지막 순간 이리라. 


헤어진 후에도 가끔 한 번씩 그녀의 질문이 초대받지 않는 손님처럼 장소와 시간에 상관없이 머릿속에 불쑥 반갑지 않게 찾아왔다. 


왜 나이 서른일곱 살이 되도록 '너는 결혼을 하지 않냐'라는 불쾌한 질문에 나는 '너는 왜 결혼을 굳이 두 번이나 했냐' 고 물어볼걸 이란 고약한 심보가 한 번씩 올라왔다.  


아주 가볍게 생각 없이 툭 던진 그녀의 질문에 내가 너무 신중하게 대답하려고 한 것에서부터 질문과 대답의 무게감이 서로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몰라, 살다 보니" 정도로 가볍게 대답해도 되는 무게감이 없는 나풀나풀 날리는 질문이었을 뿐이다. 


민희의 질문이 그리고 그날의 불쾌한 기억이 한 번씩 나를 찾아올 때마다 그저 빨리 머릿속에서 치워버리려 했는데 오늘은 나의 불쾌감과 모욕감의 근원지를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른일곱 살의 여성으로 살다 보면 왜 그 나이에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냐는 질문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한 두 번 받는 질문이 아니다. 공통점은 주로 기혼자들만 하는 질문이라는 것이다. 미혼자라면 굳이 묻지 않는다. 뭐라고 딱히 답할 수 있는 하나의 답변이 없다는 것을 서로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혼자들이 느닷없이 '왜 서른일곱 살인데 아직 결혼하지 않았냐'라고 물는 것은 마치 '왜 더 이상 배우자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이혼하지 않고 사냐?'라고 묻는 질문처럼 경박하고 무례하다. 


결혼할 나이가 되었으면 당연히 결혼을 해야 한다라는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에 "왜 결혼하지 않았냐?"라고 묻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약속이니 더 이상 부부관계도 하지 않는 남매처럼 지내는 기혼자에게 "사랑이 식었는데 왜 이혼하지 않고 사냐?"라고 묻는 것과 동일하다. 두 질문 다 그저 이분법적이고 원초적인 시각에서 나올 수 있는 질문이다. 


왜 아직 결혼하지 않냐고 친구끼리 물을 수도 있지 뭘 그리 과민 반응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볼 수는 있다. 기혼자로서 미혼자의 사고방식이 궁금할 수 있다. 더군다나 친구라면 더 (친할수록 예의를 차리라는 말이 자꾸 생각나지만 일단 접어두고) 그럴 수 있다. 친구니까 예의 차리지 않고 그냥 편안하게 물어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불쾌감이 든 이유는 '왜 결혼하지 않냐'라는 질문이 아니라,  ~라서 결혼하지 않는다라는 답변에 "결혼해서 남편이랑 같이 미국 가서  학위 받으면 되잖아?"라는 친구의 반응 때문이다. 그녀의 회신에는 나를 바꿔보겠다는 마음이 깔려있음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싱글로 살아가는 선택에 대한 이해되지 않음, 혹은 답답함이 마음속 한편에 자리 잡혀 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반응이다. 물론 그녀가 남편과 아이를 데리고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따 온 사람이라면 대화의 색깔을 다르게 관찰해 볼 수도 있다. 경험자의 미담으로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직접 경험하지 않고 묻지도 않는 조언을 해대는 건 그저 상대방의 삶에 대한 존중이 없다는 의미다. 내 삶은 그녀의 삶과 다르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때 나올 수 있는 반응임을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눈치챘던 것이다. 


우리말에서 틀리다와 다르다의 사용에 혼돈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검색창에 '틀리다, 다르다'라고만 검색해도 하루 내에 다 읽지도 못할 만큼 많은 수의 페이지가 나온다. 


생각해 보면 나도 틀리다와 다르다의 사용에 대한 정확한 구분 없이 혼돈해서 사용한 적이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두 단어의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그 앎의 정확한 시점은 기억나지 않는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타인의 삶과 나의 삶이 다를 수 있다는, 그래서 타인의 삶을 내 삶의 잣대를 들이대서 맞고 틀림을 판단하지 않고 그저 인정해야 한다는 것도 '다르다'와 '틀리다'라는 두 단어의 차이점의 깊이를 깨달은 시점부터 라는 점이다. 


왜 서른일곱 살 될 때까지 결혼하지 않고 사냐는 당돌한 질문에, 앞으로는 나도 그저 사는 방식이 다르다 정도로 새침하게 대답해볼까 한다. 









작가의 이전글 무례한 사람을 만났을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