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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쿰척 Sep 08. 2021

◇7. 서른을 바라보며 보호자가 된다는 건

최근에는 내 이름보다 엄마의 보호자로 더 많이 불리게 되었다.

엄마와 나는 어려서부터 친구처럼 지냈다. 엄마가 일찍 결혼한 편도 아니고 내가 첫째도 아니어서 엄마는 친구들 엄마보다 항상 나이가 많았지만, 난 엄마가 친구 같았다. 사실 어릴 때는 그냥 엄마랑 친하다?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난 엄마랑 단둘이 연극 데이트, 서울 투어, 여행 등을 많은 모녀가 한다고 생각하였다. 성인이 되어서 보니 엄마는 나에게 다양한 경험을 시켜주기 위해서 시간을 내어서 나를 여기저기 데리고 다닌 것이었다. 이런 점들은 나의 자산이 되었고, 성인이 되기 전 여러 가지 경험을 해봤다는 자부심과 함께 엄마와의 친밀도도 높일 수 있었다. 


엄마는 친구 같았지만, 나에게 올바를 방향을 알려주는 지도자 같기도 하였다. 엄마는 친구들과 비교하면 가장 존경할만한 사람이었고, 친구 엄마들과 비교하면 가장 친밀하게 대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엄마가 최근 몇 년 사이에 작아져 보였다.


엄마는 어느새 머리가 하얘져서 새치염색을 매달 해야 했고 기미가 심해져서 외출할 때 얼굴과 손을 꽁꽁 싸매야 했다. 인터넷 구매나 대중교통 이용도 나를 통해서 하였지만, 그래도 엄마는 여전히 나에게는 예전과 같은 엄마였다. 사실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엄마의 건강이 안 좋아졌다고 느낀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엄마는 6개월 전에 건강검진을 하였지만,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다고 조심하라는 주의 외에는 이상이 없었다. 근데 최근 몇 달 새에 엄마가 복통을 호소하는 일이 잦아졌다. 배에 몽우리 같은 게 집히는 것 같기도 해서 괜찮다는 엄마를 붙잡고 동네병원으로 향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러 가지 검사를 했더니, 건강검진에는 보이지 않던 간과 췌장 사이 어딘가에 암이 진행되고 있다고 하였다. 다행히 수술이 가능한 정도이긴 했지만 어느 정도 진행이 된 상태였기 때문에 한 시도 안심할 수 없었다.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전조증상이 잘 나타나지 않는 까다로운 암이지만, 엄마는 운이 좋게 전조증상이 있어서 검사를 진행할 수 있었고, 현재 2기 정도여서 수술이 가능하다고 한다. 수술을 진행하기 전에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진행해야 하는 데 이 과정들이 힘들 수 있기 때문에 보호자를 동반하는 것을 권장하셨다. 


암 선고는 드라마에서만 볼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갑자기 나의 현실로 다가오니 막막해졌다. 우선 이틀 휴가를 쓰고 병원을 예약하고 가족회의를 하고 놀란 엄마를 진정시켰다. 당분간은 아빠가 엄마의 병원에 동행해주기로 하였다. 엄마는 기력이 없어서 밥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아빠가 엄마의 끼니도 챙겨주기로 하였다. 요양사를 고용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우리 가족이 사지 멀쩡한데 다른 사람 손에 엄마를 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 동안 아빠가 엄마의 간호를 하였다. 여러 치료로 엄마는 점점 기력을 잃었고 연세가 많으신 아빠도 엄마 간호를 하기는 벅차 보였다. 수술 날짜를 잡기 전까지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은 내원을 해야 했는데 아빠가 혼자 모든 걸 챙기기는 힘들어 보였다. 차라리 내가 하고 싶었다.


다음 날 출근해서 휴직을 알아보았다. 생각보다 우리 회사가 휴직 제도가 잘 되어있었다. 특수한 상황(본인 및 가족 병가/간호)에 부서 내 협의를 하면 최대 6개월까지 복무기간 중 한 번 휴직을 할 수 있었다. 진작 알아볼 걸 후회가 되었다. 부모님이나 오빠한테 의견을 묻지 않고 팀장님께 휴직을 요청드렸다. 회사 사람들보다 엄마가 더 우선이었다. 다른 사람들한테 미안해할 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난 엄마의 보호자가 되었다. 그날 이후 난 엄마 따라 병원을 갔고, 어딜 가든 장인영 씨 보호자로 불리게 되었다. 엄마의 끼니를 챙기고 집안일을 하고 간호를 하다 보니 하루가 짧게 느껴졌다. 몸이 힘들어서 평생 해도 안되던 다이어트도 자연스럽게 되었다. 엄마는 집 밖에 나서면 하나부터 열까지 나한테 질문을 했고 난 모든 걸 사전에 다 준비해 놓았다. 회사 다니는 것보다 힘들었지만, 하나뿐인 엄마한테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그렇게 엄마는 나의 보살핌으로 수술을 받게 되었다. 수술을 성공적이지만, 엄마는 더 가냘퍼졌고 병원에서 생활하셔야 했다. 복직을 앞두고 있는 지금도 난 여전히 엄마의 보호자이자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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