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애가 고등학생이었던 몇 년 전에 이태리 바리(Bari)라는 남부도시의 아랫마을인 바를레타(Barletta)로 콩쿠르 참가 겸 여행을 했었다.
비행기로 프랑크푸르트에서 바리에 도착한 일요일 오전에는 한가함 그 자체의 풍경이 펼쳐졌다.
우선 거리에 사람들이 너무 없어 유명 관광지이기도 한 바리의 4월은 아직 개장하지 않은 우리나라의 해수욕장과 비슷했다.
이태리어를 못하는 우리에게는 영어로 길을 묻고 이태리어로 알아 들어야 하는 곤경에 빠졌고 때마침 공사로 기차가 끊겨 있었다.
물어도 서로 소통되지 않은 채 짐작으로 탄 버스로 몇 시간을 달려서 목적지인 바를레타에 도착했지만 일요일에는 시내의 모든 대중교통수단이 운행을 하지 않는단다.
어떻게 호텔로 갈 것인지 암담해서 우두커니 서있다가 지나가는 아주머니한테 호텔로 가는 방법을 물었다.
역시 서로 통하는 언어가 없어서 거의 30분 이상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고 또 하다가 마침내 호텔에서 차를 보내 준다는 말을 들었다.
겨우 도착한 호텔에 짐을 풀고 점심식사를 하러 나갔다.
옆에 맥도널드가 있었지만 이른 아침 비행기에다 오전 내 시달려온 여정이 서글퍼서 점심은 제대로 먹고 싶었다.
몇 번 길을 물어도 사람들이 늘 친절하게 대해준 경험이 있어서 주유하고 있는 선글라스를 쓴 멋쟁이 젊은 청년에게 가까운 곳 식당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젊은이는 길을 설명하려는 듯하더니 이내 자기 차에 타라고 했다.
이게 뭐지?
지칠 대로 지쳐서 그냥 오늘은 아무렇게 되어도 된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고 또 다른 방법을 찾을 기운이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그 청년의 차에 탔고 그는 정말로 우리를 주변에서 제일 맛있고 푸짐하다는 식당에 내려 주었다.
사실 우린 콩쿠르 일정보다 이틀 일찍 도착하였고 그 시간 동안 마을을 둘러볼 작정이었다.
사람 없는 아드리 해의 해변에서 첫날 저녁 산책을 했고 딸과 나는 오랫동안 잊지 못할 시간을 보냈다.
콩쿠르 일정 때문에 그다음 날부터는 참가자들의 연습장소인 음악원과 나름의 다운타운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또래 엄마들과 여러 가지 언어로 소통되지 않는 유쾌한 수다를 나눴다.
동네는 역시 생각만큼 작았고 골목은 토박이만 운전해서인지 매우 거칠게 다니는 작은 승용차와 사람들은 용케 서로의 걸음을 방해하지 않았다.
이곳을 또 오진 않겠지, '평생 다시 오지 않을 여행지라...'는 생각이 머리에 맴돌았다.
벌써 10년가량 살았던 유럽생활이라 이렇게 작은 마을에 고생하며 또 올 거 같지는 않았다.
모든 일정이 지나고 우린 독일로 돌아왔고 시간은 흘러서 딸은 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나 한 학기가 지나고 시작된 코로나19의 불행은 유럽 중에서도 이태리의 피해가 심하다는 뉴스가 연일 보도가 되었다.
그때 지난 바를레타에서의 며칠을 기억해 냈다.
우리가 길을 묻기도 전에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으면 먼저 다가와 도움이 필요한지 물어보았던 사람들
게다가 지나가던 다른 사람들까지 합세해 앞다투어 길을 가르쳐 주던 그들.
몇 사람이 서로 가르쳐주다가 일행처럼 친해져서 함께 웃던 그들의 모습이 머리를 떠나지가 않았다.
식당에서 예술작품처럼 정성스럽게 음식을 만들어주던 요리사의 모습도 기억나고, 오후 1시부터 한낮의 휴식시간을 위해 오전 일과를 부산하게 보내던 사람들이 생각났다.
다시 가지 않을 거 같았던 작은 마을에서 만난 그들의 평온한 일상들이 염려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들이 코로나19의 피해를 입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랬다.
십여 년 동안 많은 여행지를 다녔지만 가장 가슴으로 기억되는 도시가 바를레타다. 볼 것이 많은 곳도 아닌데 그렇게 기억에 남게 만든 건 친절한 사람들이 다였던 거 같다.
가던 길을 멈쳐서서 낯선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며 같이 마음을 나누고 웃을 수 있었던 그들의 모습은 꽃보다 아름답다는 그 말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