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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암비 Jul 30. 2021

단념(斷念)

장소가 주는 아쉬움

둔촌주공아파트


2년 전, 라야 감독의 <집의 시간들(2017)>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재개발을 위한 철거를 앞둔 ‘둔촌주공아파트’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였다.

그 영화는 나에게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사는 동네 근처도 재개발을 앞둔 상황이기 때문이다.

현재 내가 가족들과 함께 사는 아파트 후문 쪽에 있는

주택단지들은 모두 재개발 공사가 시작되어 허물어지고 있다.

몇 달 전부터는 사람들이 전부 이사를 하였고

사람의 온기가 없는 건물들은 급속도로 황량해졌다.

그저 빈집을 어슬렁거리며 사람들이 먹다 버린 음식이 있는지

먹이를 찾는 길고양이들만 있을 뿐이다.


요즘 들어 동네를 걷고 있으면 예전에 친했던 친구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친구들이 지금 다들 뭐 하고 사는지 알 수는 없지만

현재 철거 중인 동네에 친구들이 살던 집을 마주할 때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해야 할까?


나는 오래전 건축 관련 서적에서 사람은 장소에 대한

정체성을 가지기 때문에 장소가 사람에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나에게 장소에 대한 첫 정체성을 제대로 알게 해 준 곳은

바로 나의 첫 자취방이었다.     


나는 부산에서 대학교를 다녔다.

타지에서 공부를 해야 했던 나는 처음으로 자취를 했다.

자취방에서 나는 4년간 공부를 하고 꿈을 키웠으며,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기도 했다.

그 작은 원룸은 나를 성장시켜주는 오로지 '나를 위한' 소중한 공간이었다.

4년 후 졸업을 마치고 다시 본가로 가려고 짐을 싸는데 마음이 뒤숭숭했다.

나의 자취방에는 새로운 신입생이 와서 살 것이고

나와 같은 나이에 비슷한 시간을 보낼 것이다.

시간은 가도 모든 것은 똑같이 흘러간다.     


장소는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

사람들은 어떤 장소를 기억하고 사랑할까.  

   

허진호 감독의 영화 <봄날은 간다(2001)>에서는 ‘수색역’이라는 장소가 나온다.

내가 좋아하는 역 이름 이기도 한 ‘수색역’은 듣기만 해도

허진호 감독의 아름다운 영화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수색은 ‘물치’라는 순 우리말 지명을 한자로 훈차 표기한 것으로,

마을 건너편에 있는 냇가의 풍치가 좋다는 의미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현재는 신 역사로 세련된 분위기의 외관을 보여주고 있지만

사실 수색역의 구 역사는 대단히 아름다운 풍경을 가지고 있었다.     

구 역사는 1950년대에 지은 역사 건물답게 빨간 벽돌에 청색 지붕을 가지고 있었으며,

오래된 역사를 지닌 곳인 만큼 영화 촬영지로 많이 활용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구 역사는 문화재로 지정이 되지 못한 채

결국, 철거되고 말았다.     


나는 수색역이 철거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정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왜냐하면, 내 기억 속 수색역은 영화의 한 장면에 머물러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 자리에 내가 기억하는 구 역사 건물이 없어졌을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어릴 때 살던 곳을 가면 많이 바뀐 풍경에 섭섭함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기 때문이겠지….’

‘내가 어른이 되었기 때문에 옛날에 커 보이던 건물들도 작게 느껴지는구나….’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들만의 추억의 장소를 가면 이렇게 단념하곤 한다.


최근 나는 부천에 있는 세계 유명 건축물 테마파크인 아인스월드를 지나친 적이 있다.     

아인스월드가 처음 개장했을 때,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가족들과 보았던 아인스월드는 정말 환상적인 곳이었다.

세계 각국의 유명한 건축물들을 정교하게 축소해놓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어릴 적 기억에 남은 아인스월드는 현재 무슨 이유에서인지,

기억 속 모습과 다르게 노후화되어 방치되고 있는 상태였다.    

 

그 이후 나는 사라진 장소들이나 발길이 거의 없는 잊혀가는 장소들에 관심이 생겼다.

사람들의 단념이 녹아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굉장히 많은 곳이 있었다.


마산에 오동동 아케이드….

종합레저타운이었던 부곡하와이….

그리고 발길이 많지 않고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가는 간이역들….    

 

그중 전라선에 있는 ‘죽림온천역’ 은 꼭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죽림온천역은 2006년 10월 열차 운행이 중지된

간이역으로 그곳에는 단념의 적막한 기운만 감돌고 있다고 한다.

죽림온천역의 근처에는 실제로 온천이 있다.

원래는 관광지로 개발하려 했으나, 성과를 얻지 못하고 종지부를 찍었다.

현재 죽림온천역은 선로를 관리하는 사람들에게만 모습을 허용하고

일반인에게는 접근이 허용되지 않고 있는 쓸쓸한 곳으로 남아있다.     

죽림온천역의 적막한 기운은 화려했던 과거의 관광개발지를 뒤로한 채,

제자리에 남아 지나가는 열차들만을 위해 자리를 내주고 묵묵히 단념하고 있다.

마치 그 풍경이 장소에 대한 아쉬움을 단념하는 사람들의 마음처럼 느껴진다.

 

죽림온천역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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