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은 내용보다도 정의(definition)가 중요하다
작가 : 조예은
출판사 : 안전가옥
출판시기 : 2023년
형태 : 단편소설
출판사 서평 :
이토록 생생한 어둠
어떤 감정은 곧잘 무시당한다. 여성이라서, 자식이라서, 부유하지 못해서, 남들과 어울리지 못해서 겪는 어둡고 축축한 마음이 그렇다. 괴로움을 호소했다가는 너무 예민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 문제는 별것 아니라고들 한다. 조예은 작가는 《칵테일, 러브, 좀비》 속 모든 작품에서 홀대받는 감정들을 생생하게 끄집어내며 반기를 든다. 그러한 감정들에는 분명한 실체가 있으며 그 주인에게 구체적인 고통을 안긴다.
허리가 길다고, 이마가 좁다고, 저번에 입은 옷은 영 별로였다고 쉽게 평가하는 남자친구를 향해 바로 전하지 못한 말들은 가시가 되어 목구멍을 찌른다(〈초대〉). 수십 년 인생을 남편 뒷바라지에 바친 아내는 좀비로 변한 남편을 보며 “저 막돼먹은 인간 없이 사는 게” 무섭다며 울먹인다(〈칵테일, 러브, 좀비〉). 침전된 괴로움은 비극의 씨앗이 된다. 가족에게 폭력을 휘둘러 온 아버지가 어머니를 칼로 찌르자, 목격자인 자식은 이내 그 칼로 아버지를 찌른다(〈오버랩 나이프, 나이프〉). 살아서 다 풀지 못한 어둠은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하여 쓸쓸하게 세상을 떠난 넋은 귀신의 모습으로 그 자리에 남아 환영받지 못하는 신세를 이어 가는 것이다(〈습지의 사랑〉).
제목이나 표지만 보고서는 내가 절대 고르지 않았을 것 같은 책. 읽어보게 된 계기는, 팟캐스트 여둘톡에서 김하나 작가가 '여름에 바닷가에 갈 때에는 단편소설집을 챙겨가세요'라고 말하면서 이 책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김하나 작가의 취지는 '휴대폰이나 전자책 대신에, 한 손에 쏙 잡히는 종이책, 그것도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소설, 그리고 호흡이 끊겨도 상관 없는 단편집을 챙겨가라'는 것이었지만 - 나는 밀리의 서재에 있길래 전자책으로 읽었음 ( '-')
그로테스크한 소재나 전개를 사용하는 작가인데 마낭 호러만을 추구한 게 아니라 '소외된 것, 예민한 이들'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있어서 읽는 재미가 있었네.
안전가옥 쇼-트 시리즈의 두번째 책이라고 하는데 해당 시리즈의 다른 책들은 어떤 성격일지 궁금해지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