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면 다인 줄 알았던 그 녀석을 떠올리며
"나도 불행하다 생각했는데 너보단 나은 것 같아"
해맑은 얼굴로 내 가슴에 비수를 꽂던 너의 말을 기억한다. 나의 불행이 누군가의 위로가 될 수 있단 건 잘 알고 있지만 그걸 입 밖으로 뱉어 내가 나의 불행을 다시금 원망하게 만들던, 너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며 살고 있을까. 호수 위를 유람하듯 잔잔한 일상을 살다 이따금씩 네가 생각난다. 웃기게도 너와 사랑하던 시간이 아닌 네가 내 심장에 꽂은 굵직한 바늘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내 상식으론 도저히 남에게 할 수 없던 말이라 당황해 널 말없이 한참을 쳐다봤다. 넌 여전히 본인이 뱉은 말이 내게 큰 상처가 됨을 모르는 눈치였고 난 거기서 너와의 이별이 멀지 않았음을 예감했다. 그냥 너에게 작은 위로가 듣고 싶었을 뿐인데, 넌 내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불행과 내 불행을 저울질했을 거란 생각에 내가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을 잘못 봤구나 싶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사랑해 마지않던 너였는데 한 마디 말로 널 사랑해도 되는지에 의문을 품었다. 이날 이후 난 너에게 내 아픔에 대해 말하기 망설여졌고 그렇게 우리는 이별했다. 넌 우리가 헤어진 이유가 긴 연애에서 오던 권태로움이라 생각하겠지만 난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우리의 대화엔 공감이 없었고, 너와 어떤 대화를 나눠도 결론은 '너'로 끝났다. 너는 내 이야기를 카페 음악마냥 흘려 들었고, 네가 말할 땐 내가 너를 치켜세워주길 바랬다. 이토록 일방적인 관계라니. 너와 함께하며 허망하게 날아간 내 일 년은 검게 얼룩져 종종 날 아프게 한다.
일 년 선물로 네가 29,900원짜리 티셔츠를 사 온 그날, 서운해하는 내게 네가 한 말도 선명히 기억난다.
"네가 서운하다니 미안해. 그런데 난 네가 돌멩이를 주워왔어도 좋아했을 거야."
순식간에 돈만 밝히는 여자가 됐다. 나는 널 위해 편지도 쓰고, 너와의 커플 시계를 사기 위해 꼬박 돈을 모았다. 내 말의 핵심은 가격이 아닌 정성의 차이였는데. 그 흔한 꽃 한 송이 받지 못한 내가 너무 가여웠고, 티셔츠가 들어있던 쇼핑백 안에 '교환/환불불가'가 적힌 29,900원 영수증이 있던 사실은 너에게 있어 아무렇지 않은 일이었나 보다. 연인에게 줄 선물을 매장에서 산 후 한 번도 확인하지 않았기에 영수증이 있었을 테고, 내게 29,900원 티셔츠를 사줄 때 "비싼 거야"라며 거짓말하던 네 모습은 다 잊힌 거겠지. 백일 때는 백화점에서 목걸이를 해 오던 너였는데 말이다. 그리고 너는 그 일이 있고 이주 뒤쯤에 네가 갖고 싶다 입이 닳도록 말하던 2,000,000원에 호가하는 카메라를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