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일주 여행이 3일 전으로 다가왔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세계일주를 간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는데, 집도, 차도 처분하고 달랑 여행 가방 하나만 들고 부모님의 집에 얹혀서 며칠 지나니 이제는 조금 실감이 난다. '나 정말 가는구나'.
실감은 나기 시작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마음의 동요는 크지 않다. 약간의 설렘과 조금 더 큰 두려움의 감정 정도. 아마도 그동안 꽤 많은 곳을 여행으로 갔다 와서 설렘이 덜한 것이지 않을까 싶다. 물론 내가 가보지 못한 곳을 여행한다고 생각하면 여전히 롤러코스터가 내려갈 때 아랫배에서부터 소름이 돋는 느낌이 들기는 한다.
김영하 작가는 그의 책 '여행의 이유'에서 '여행은 일상의 부재'라고 표현한다. 지겨운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여행 가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나도 동의한다. '일상의 부재'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나의 생각을 더 부연하자면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일상의 부재'는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행위와 '싫어하는 것으로부터의 회피'하는 행위를 포함한다. 전자는 도파민을 분비시키기 때문에 즐거움과 중독성을 유발하고, 후자는 세로토닌을 분비시키기 때문에 안도감을 준다. 즐거움, 안도감이 묘하게 공존하는 것이 여행인 셈이다.
처음 내가 세계여행을 꿈꿨을 때는 후자에 대한 이유가 더 컸다. 수능을 갓 마친 나는 한국의 숨 막히는 경쟁 사회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전문의가 되고, 군대를 갔다 오면 꼭 세계여행을 가야겠다는 마음을 품고 오랜 공부와 수련의 기간을 버텼다. 목표만을 바라보고 달리다 지쳐버려 회피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여러 차례 여행을 다니며 배운 것이 있다면, 아무리 재밌고 흥미로운 여행지를 가더라도 조금만 오래 머물면 거기도 '일상'이 되어 질린다는 것이다. '회피한 곳'이 '일상'이 되면 이제는 더 이상 회피할 곳도 없어진다. 결국 우리는 다시 처음의 '일상'으로 돌아온다.
이제 나는 여행을 다닐 때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일상의 부재'에 조금 더 집중한다. 이번 세계일주도 마찬가지이다. 세계일주를 통해 거창한 뜻을 이루려는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것들에 끊임없이 나를 노출시키다 보면 약간은 성장하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감은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성장이라 함은 '이해하는 능력'을 말한다. 요즘 같이 AI 기술이 발전한 시대에 나는 정신과의사에게 더 중요해진 것은 지식적인 능력보다는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공감을 잘하려고 해도 진정으로 상대를 이해할 수 못한다면 환자는 그 거짓된 공감을 금세 알아차린다. 그런 현상은 환자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좋지 않다.
여행을 다니며 '일상'에서 벗어나 '미지'에 계속 노출되면 반강제적으로 남을 이해하는 능력이 길러진다. 그 나라의 문화와 환경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여행을 지속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자신이 편안한 환경만 고집하게 되는데 여행은 그 고집을 자연스럽게 꺾어준다. 나는 그래서 여행을 좋아한다. 조금만 다른 것들을 받아들이려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의 그릇이 넓어지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세계일주가 나를 대단히 바꾸지는 않겠지만, 조금은 나의 그릇을 넓혀주기를 기대해 본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 여행이 '회피'하는 목적이 아예 없지는 않다. 그동안의 경쟁과 목표 달성에 분명히 지치긴 했다. 나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을 오랜 기간 영위하는 존경스러운 분들에 비해서 내가 한 일은 굉장히 미약하지만 나는 그들만큼 그렇게 강하지는 않은 것 같다.
가끔은 회피가 좋은 답이 되기도 한다. 억지로 버티다 보면 부러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때에는 회피를 하고 싶어도 회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기도 한다. '일상'에 너무 큰 관성이 생기면 잠깐 멈춰 서기도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 '일상'이 너무 무거워지기 전에 한번 내려놓는 시기를 가져보려는 것이다.
사실 어느 순간에 한 번은 '일상'을 내려놔야 하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꿈을 쫓아가다 보면, 남을 쫓아가다 보면 내려놓아야 할 타이밍을 놓쳐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한번 기회를 놓치면 점점 더 기회를 잡기 어려워진다. 이번에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아보려고 한다.
세계를 돈다는 건 어쩌면 거창한 말일지도 모른다. 사실은 단지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일일 뿐이다. 지도를 펼쳐 놓고 행선지를 정하는 대신, 발걸음이 가는 대로 흘러가보는 것.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나는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어디쯤에 서 있는지 알게 될지도 모른다.
세계일주를 마친 1년 뒤의 나는 어떨까. 조금은 변화가 있을까. 아니면 머리만 길고, 피부만 타고, 속은 그대로인 채로 돌아오게 될까. 사실은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뭐, 그것도 괜찮다. 모든 여행이 끝까지 가야만 의미 있는 건 아니니까. 중요한 건, 한 번쯤 그렇게 멀리 가보고 싶었다는 마음을 따라 한 걸음을 내디뎠다는 사실. 남들이 이루지 못한 버킷리스트를 나라도 한 번 시도해 봤다는 것만으로, 나는 아마 꽤 뿌듯할 것이다. 그리고 그게 나에겐 충분하다.